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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윈도] 위기 도사린 접전의 이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만약 빌 클린턴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내년 1월 20일 정오까지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이끌어 가나. "

"그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재투표를 하더라도 팜비치 카운티에서만 할 테니까 1~2주면 될 것이다."

"플로리다의 민주당 지지 유권자들이 낸 소송이 끝나려면 한참이 걸릴 테고 만일 재투표를 하게 되면 또 시간이 걸린다. 헌법에 따르면 12월 18일엔 선거인단이 모여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데 플로리다 25명이 없이 가능한가."

"그렇게까지 될 리는 없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묻는 것 아니냐. "

"아, 참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잠깐만 기다려달라. (1분후쯤)아, 여기 있네. 대통령 승계법에 따라 정.부통령이 없으면 하원의장이 대통령을 대행한다."

연방선거위원회에 15년째 근무하는 선거조사 전문위원 핸콕 브라이언은 9일 오후(현지시간) 기자들 질문에 결국 법전을 뒤졌다. 그의 머리 속엔 '대선 유고(有故)' 란 파일은 없었던 것이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희대의 정치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에는 현 상황이 제도의 실패나 인재(人災)보다는 상식으론 생각할 수 없는 예외적 접전 때문이라고 자위하는 분위기가 있다.

대혼란의 서막을 올렸던 오보 방송 책임자 중 한 사람인 NBC TV 셸던 가위저 상황국장은 워싱턴 포스트에 "부시 후보를 당선자로 발표했던 우리 예측보도가 틀릴 확률은 2백분의1 미만이었다" 고 해명했다.

재검표를 통해 드러난 1차 개표 오산(誤算)도 두 후보 표차가 컸다면 별 문제 없이 넘어갔을 수도 있다.

팜비치 카운티 투표용지 문제도 '선의의 실수' 였다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혹시 인터넷을 제압하고 세계문명을 주도한다는 지나친 자신감이 '부시 당선' 의 경박함을 자초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축전을 보낸 세계 여러 나라 지도자들까지 웃음거리로 만든 것은 아닌가.

플로리다 전체 투표구는 약 8천개나 됐다. 1차 개표에서 나타난 1천7백84표의 차이는 5개 투표구당 한 표라는 기적적인 수치였다.

플로리다의 접전은 이미 여러 차례 예견됐는데도 CNN.CBS.NBC 등 주요 방송 여론조사 연합체는 겨우 투표구 45개를 골라 1천8백18명만을 조사한 뒤 "차기 대통령 부시" 라고 서둘러 외쳤던 것이다.

CBS의 유명한 앵커 댄 래더는 8일 오전 3시쯤 부시를 당선시켜놓은 선거특별방송을 마감하면서 "이번처럼 치열했던 선거는 요즘 투표를 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한 표가 얼마나 위대한지 교훈을 줬다" 고 점잖게 훈계했다.

20분 후 그는 그 치열한 선거 때문에 '부시 당선' 을 취소해야만 했다.

뉴욕 타임스는 9일자 사설에서 '이번 사태가 헌법적 위기로 치달을 위험을 자제력으로 막아야 한다' 고 지적했다.

그리고 전체 득표에선 이기고 선거인단 확보에서는 진 후보가 혹시라도 일부 상대방 선거인단을 회유해 12월 18일 선거인단 투표에서 자신을 지지하도록 한다면 헌법에 중대한 위기가 될 것이라고 경고까지 했다.

선거조사 전문위원 브라이언의 말대로 재검표.재투표 문제가 원만히 풀려 합법적 권력이양이 될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그런 낙관의 가면 밑에 뉴욕 타임스 사설처럼 위기의 불안감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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