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대 철학자 이정우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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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3세대 철학자 이정우에 대한 신뢰감은 지난해 이후 선보이고 있는 저작 시리즈 '시뮬라크르의 시대' '삶 죽음 운명' '접힘과 펼쳐짐' (이상 거름 펴냄) 세권 때문이다.

원고 내용에 대한 호감 때문에 철학책으로선 이례적으로 국내의 1급 북디자이너 정병규가 편집을 맡았다는 점도 관심거리다.

이정우-정병규 콤비가 각기 내용과 포장을 맡아 만든 세권의 책은 국내 철학 저작물의 뛰어난 성과이자, 동시에 순수 철학서 중 가장 많이 팔렸다는(전체 2만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 세권은 서양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이나 라이프니츠 등의 철학을 '비빌 언덕' 으로 삼아 꼼꼼히 천착하면서, 조심스레 동북아의 독자적인 전통적 사유와의 만남을 모색하고 있어 서양철학을 단순히 소개만 해온 기존 철학서와 구별된다.

따라서 지식대중들의 이례적인 호응도 어렵지 않게 설명이 된다. 내용은 전에 없이 깊이가 있으면서도 글쓰기의 방식은 친절하기 때문이다.

세권의 책은 탈(脫)아카데미즘의 산물이다.

이정우가 3년전 교수직(서강대)을 떠나 이화여대 강의실을 빌려 철학대중을 위해 벌이고 있는 연속강좌 내용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지난 4월부터 서울 인사동에서 철학 대안학교인 '철학 아카데미' (02-722-2870)를 개원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철학 아카데미는 철학을 가르치는 교양강좌 학원이 아니다. 연구 기능을 가진 학술단체이자 시민운동의 거점이기도 한 대안 철학의 공간이다.

격월간 '아카필로' 의 발행, 이정우를 포함한 10여명의 30~40대 젊은 철학자들의 동참, 3백여 수강생들의 열렬한 수강 등은 이 시대 철학운동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런 풍경은 신간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에서 말하는 '새로운 오솔길' 에 대한 전망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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