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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벤처 어디로 가는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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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4면

한국 벤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21세기 우리 경제의 대안으로 기대되며 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벤처기업들이 ‘정현준 게이트’의 충격파에 흔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에서 벤처의 역할은 적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위기에 처한 벤처기업의 활로는 어디서 찾아야 하며, 수많은 벤처 CEO(최고경영자)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한국 벤처의 양대 축인 벤처기업협회의 장흥순 회장(터보테크 대표)과 인터넷기업협회의 이금룡 회장(옥션 대표)을 만나 벤처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사회=최근 벤처 관련 협회들이 ‘정현준 게이트’와 관련해 공동 성명까지 냈는데,이번 사건이 갖는 의미와 문제점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이금룡=우리가 한 목소리를 냈던 가장 큰 이유는 외환위기 이후 꿈.희망.대안을 상징해 온 ‘벤처’라는 단어가 일부의 부도덕한 ‘머니 게임’탓에 훼손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였습니다. 벤처기업인들이 더욱 윤리적이고 검소한 경영을 하는 한편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높은 비중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장흥순=이번 사건은 벤처기업들이 인프라나 제도적인 기반 없이 시장의 힘에 의해 급격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입니다. 흔히 정보통신의 ‘혁명’이 이뤄진다고 말하는데, 혁명이기 때문에 예측이 어렵고 변화가 많습니다.성장과정에 버블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또 문제있는 기업과 CEO는 반드시 퇴출돼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기업가 정신을 갖고 밤을 새워 연구하는 많은 벤처기업인들을 한꺼번에 매도해서는 안됩니다.

이=앞으로 벤처기업인들은 더욱 더 스스로를 낮춰 겸손하고 투명한 경영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사회=정현준과 같은 사람이 나오게 된 배경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취약한 시장환경이나 정책의 뒷받침이 부족한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새로운 환경이 나타나면서 제도.시스템.법규.윤리가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종의 공백이랄까 허점이 나타난 것이지요. 이런 틈새를 노려 이번 사건 당사자들과 같은 사이비 벤처기업인들이 활개를 친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 전통적인 기업경영의 축은 ‘차입경영’입니다.반면 벤처기업은 차입이 아닌 ‘펀딩 경영’이 특색입니다.펀딩경영이란 ^코스닥을 통한 직접 자금조달^벤처캐피탈을 통한 조달^인수·합병에 의한 자금의 조달을 뜻하는데,이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법이지요.

장=한국사회는 하나의 사건을 침소봉대해 큰 흐름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미국의 나스닥 시장도 결코 일직선으로 성장해 오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침체와 상승의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 발전하는 트렌드를 보여 왔습니다. 한국은 이제 한 사이클(상승과 침체)을 마쳤을 뿐이다. 그런 견지에서 정부의 대책은 벤처기업 경영환경을 건전화하고 각종 감시 제도를 강화할 필요는 있지만, 큰 흐름을 거슬러서는 안됩니다.

이=사실 금융과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관료들이 너무 바쁩니다.현재의 금융위기 등에 대처하기에도 어렵다 보니 신경제에 걸맞는 인프라와 제도 정비에 신경을 못쓰고 있는 것이지요. 아직도 고위 관료들은 벤처캐피탈을 마치 사채업자처럼 취급합니다.그러나 벤처캐피탈은 ‘펀딩경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주체인데 이에 대한 연구.분석은 거의 없습니다.

사회=사실 국내 벤처캐피탈은 규모도 작고 대부분 단기적으로 운용돼 제 역할을 못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양 협회는 벤처를 활성화하기 위해선 그밖에도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고 지적해 왔는데요.

장=나스닥 활성화의 계기가 된 미국 정부의 정책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스톡옵션 제도의 활성화이고, 또 하나는 연·기금의 직접 투자를 허용했던 점입니다. 연.기금들이 투자의 불씨를 지피고 그 과실을 얻어 재투자하는 선순환이 일어나 신경제의 초석이 됐습니다.지금 우리나라는 2백조원에 이르는 연.기금이 있는데 대부분 부실화돼 있습니다. 신경제의 흐름을 확신한다면 이제 연.기금이 간접적으로나마 벤처기업에 투자할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보다는 제도 개선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적대적 인수.합병(M&A)의 허용도 고려해야 합니다. 지난해 코스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많은 유력 벤처기업들은 미국의 모델을 따라 M&A를 통해 경쟁력을 갖춰 나가야 하는데 현재는 의결권 행사에 제한이 있는 등 제도적 한계가 많습니다.

장=주식 교환(Stock Swapping)제도도 시급히 도입돼야 합니다.

이=언론 혹은 여론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국내 언론은 타법인 출자를 무조건 ‘문어발 확장’으로 매도하는데,문어발과 네트워크, 스피드경영과 조급증은 구별해야 합니다. 재벌이 서로 관련없는 업종으로 다각화했던 것은 자금조달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핵심역량을 갖춘 벤처가 필요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유관분야로 네트워크화하는 과정입니다. 제휴와 지분교환을 늘리는 것을 무조건 ‘문어발 확장’으로 봐선 곤란합니다.

장=문어발로 상징되는 비관련 다각화 사례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기업은 그 순간 경쟁력을 상실합니다. 전력을 다해 집중할 시점에 불필요한 곳으로 역량을 분산한 기업은 자연스레 퇴출되는 것이지요.

사회=이제 ‘사람’얘기를 해 보지요.벤처기업은 대부분 창업 초기단계의 기업이고 CEO 중에는 기업경영 경험이 없는 이들도 많은 점을 들어 CEO들의 자질 문제를 거론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장=CEO는 벤처기업에서 7∼8할의 비중을 차지할만큼 중요합니다.대개 시작은 기술자가 하지만 곧 종합적인 경영능력을 요구받습니다. 그런데 종합적인 경영능력은 결코 ‘정신력’이나 창업초기의 ‘하면 된다’로 될 일이 아닙니다. 한국축구가 일본을 ‘정신력’으로 이길 단계를 넘은 것과 마찬가집니다. 창업자 본인도 열심히 해야지만 이젠 혼자서 다 하는 단계는 지났습니다.훌륭하고 도덕적인 재무(CFO).조직(COO)전문가를 영입해야 합니다.

이=최근 방한했던 미 코델대의 네샤임 교수는 미국 벤처 창업자의 CEO 수명이 3.3년이라고 말했습니다. 3년이면 그 사람이 CEO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검증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우리도 이제 창업 후 2∼3년이 지나면 창업자가 스스로 경영을 할 지 훌륭한 인력을 수혈받을 지를 따져볼 때가 됐습니다.

사회=결국은 CEO가 얼마나 스스로의 능력을 깨우쳐 가느냐가 기업성패의 중요한 요소라고 봐야겠습니다. 테헤란로 등에는 CEO들의 모임이 적지 않은데 요즘은 어떤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까.

이=최근 많이 느끼는 것은 ‘지금은 창업이 아닌 경영의 시기’라는 점입니다.CEO의 그릇이 작으면 급변하는 기술.경영환경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기업의 그릇이 CEO의 그릇밖에 안되는 것이지요.따라서 CEO는 스스로 계속 배우고 변화해야 합니다.

사회=협회 차원의 교육 프로그램은 없습니까.

장=벤처기업협회에서는 지난 여름에도 부부동반의 ‘벤처CEO 서머스쿨’강좌가 있었습니다.최근의 어려운 상황 자체가 CEO들에게는 큰 교훈이 됐을 것입니다. 요즘은 기업인들의 자세도 많이 낮아졌습니다. 벤처기업은 주변의 사랑과 신뢰로 커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고나 할까요.

사회=벤처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되살려 ‘사랑받는 벤처’로 거듭나기 위해 내부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미국에서는 인도인 엔지니어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엔지니어의 30%가 인도인이며, 올해에만 8만명이 미국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인도인이 잘 나가는 것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성실하다는 게 널리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일을 맡겼을 때 믿을만 하다는 것이지요. 우리 벤처기업인도 이처럼 검약하며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정부의 벤처정책도 기업차원에서 접근할 게 아니라 국가전략 차원에서 정립돼야 합니다.

장=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환경이 나빠졌다고 탓할게 아니라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네트워크 형성과 마케팅 등 경영에 신경써야 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최소한 줄여야 하겠지요. 그래야 살아남고, 살아남은 자에게 기회는 옵니다. 아직은 벤처기업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5년, 10년 뒤에는 세계적인 스타급 기업들이 속속 등장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정리=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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