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태초의 말과 몸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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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는 한 달에 한번씩 '시의 숨결' 이라는 제목의 시 낭송회가 열린다.

매달 한 사람씩 각각 다른 시인이 나와 자신의 시를 낭송하고, 평론가가 해설도 하고, 시인의 이야기도 들려주고, 관객과 대화도 한다.

이와 아울러 유진규의 마임 공연이 있다. 유진규는 그 달에 낭송하는 시인들의 시 한 편에 빗대 마임을 공연한다.

나는 대학 시절부터 마임 공연을 아주 좋아했었다.

마임 공연을 쫓아다니면서 아무 것도 없는 텅빈 무대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마임이스트가 텅빈 두 손으로, 몸짓만으로 새로운 세상을 지어내는 마임의 세계에 홀렸었다.

말을 하지 않고, 춤을 추지 않고도, 저리도 텅 빈 시간을, 저리도 간결한 무대를 꽉 채울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말없는 말은 흡사 언어를 쓰면서도, 언어로만은 말할 수 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시의 언어와 흡사했다.

내한한 마르셀 마르소의 몸짓 속에는 말 없이도 뿜어낼 수 있는 무한한 언어가 숨어 있었다.

이십오륙년 전 한국의 젊은 개척자 마임이스트들이 올라서곤 하는 신촌 시장통의 그 가난한 무대, 그들의 몸부림 속에서 건져 올리는 웃음의 몸짓 속에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육중하게 잠긴 문 앞에서 그 잠긴 문을 열려고, 얼음으로 만든 열쇠를 들고, 그 얼음이 녹아 버릴까봐 노심초사 서 있는 예술가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참혹함도 숨어 있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렇게 육중하게 버틴 채 열리지 않던 그 문도 곧 녹아 버릴, 보이지도 않게 될 가상의 문이었으니.

시와 마임은 다른 어떤 예술 장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 첫 번째가 둘 다 침묵의 예술이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시는 언어가 그 주재료이지만 언어 속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의 세계를 그린다.

그래서 좋은 시일수록 그 한편의 시가 무엇을 말하는지 해석을 하려면 무궁무진 말을 쏟아놓든지, 아니면 입을 다물고 그 시가 펼친 침묵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든지 해야 한다.

또한 마임과 시는 관객이나 독자의 무한한 참여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다. 팬터마임과 달리 마임은 문을 그리지 않고, 문 그 자체가 되어서 말한다.

그러기에 문의 말을 듣기 위해, 아니 관객 스스로 문이 되어 열리기 위해 관객은 방관자가 아니라 상상력을 가진 참여자로 마임에 임해야 한다.

시와 마임은 자신의 몸에서 마음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그 동안 들리지 않던 몸의 말을 들려준다.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때, 관객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이 우주에 미만한 생명 있는 몸들의 대화, 그들의 말을 함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두 장르의 가장 비슷한 점은 인류가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탄생한 예술 장르라는 점이다. 이 두 장르로부터 모든 예술은 발원해 큰 강을 이루어 흘러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초의 몸짓 언어와 노래 언어는 이제 시끄러운 소음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한없이 움츠러드는 것만 같다.

이제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이 두 장르는 이 오염된 말들, 엉클어진 속된 몸짓들, 죽어 버린 대화들을 남겨두고 어딘가로 들어가 꽁꽁 숨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마임은 서양의 테크닉에 기초한 동작들과 우리의 탈춤과 굿의 몸짓언어들의 영향 속에서 나름대로 한국적 마임이라는 것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춘천 국제마임축제도 있고, 한국 마임페스티벌도 열린다. 그리고 우리말의 결을 다듬어 우리말의 세계를 한없이 확장하려는 시인들이 아직도 시를 쓰고 낭송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의 한 구석에서 이들이 만나 침묵의 대화를 나누는 밤이 한 달에 한번씩 열리고 있다.

김혜순 <시인.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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