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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경질당한 일본의 양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일본 문부성 '교과서검정조사심의회' 노다 에이지로(野田英二郞)위원은 최근 다른 위원들에게 한 교과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문서로 보냈다.

이 문서는 우파 학자단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 검정 신청을 낸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노다는 황국신민사관을 정당화하고 있는 이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 독일의 네오나치즘과 동일시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교과서가 한일합방의 필요성을 적어 한국을 자극하고 있으며, 일본이 중.일 전쟁에 휘말렸다는 표현을 써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노다의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한 관계 당국의 대답은 그의 자격 박탈로 나타났다. 일본 문부성은 지난달 30일 검정조사분과위 소속이던 그를 가격분과위로 발령냈다. 검정작업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다.

노다의 인사는 자민당 우파의 압력 때문이다. 한 보수 언론이 노다의 문서 문제를 들고나오자 자민당은 지난달 26일 파면을 요구했었다.

이른바 자학사관을 비판해온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 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모임의 회원은 1백명을 웃돌고, 전직 사무국장이 내각의 요직을 맡고 있다. 자민당과 보수세력의 논리에 외교적 고려는 기도 펴지 못하는 상황이다. 노다 경질로 미뤄보면 문제의 교과서는 내년 3월 검정 합격이 확실해 보인다.

노다 경질사건은 재일동포를 비롯한 영주 외국인에 대한 지방선거권 부여 법안처리 과정을 상기시킨다. 선거권 부여는 자민.공명.보수당 연립정권의 합의사항이었다.

그런데도 자민당 우파들은 뒷다리를 잡았고, 결국 연내 처리는 사실상 물건너갔다. 우파들은 선거권 부여가 위헌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 정부의 조기 처리 요청을 내정간섭으로 몰아세운 의원도 있었다. 법안을 아예 폐기하려는 움직임들인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교과서는 일본의 역사인식 잣대로 국내 문제만이 아니다.

전쟁 미화와 황국사관이 전편을 꿰뚫는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의 교과서가 자구(字句) 수정으로 끝날 일인가.

일본 당정이 국내 논리만을 강조한다면 군국주의 피해를 본 주변국과의 관계는 꼬일 뿐이다. 과거사 문제가 불거진다면 '정치대국 일본' 을 내거는 우파들의 슬로건에 대한 의구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이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주변국은 주시하고 있다.

오영환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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