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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행금지 → 전투기 위협 → 해안포 발사 … 북 ‘시나리오 도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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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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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이틀에 걸친 서해 포 사격은 고도의 시나리오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큰 틀로 보면 지난해 말 가속화하기 시작한 북방한계선(NLL) 흔들기다. 무력 시위로 정전협정 체제 당사국들에 평화협정 회담 필요성을 선전하고 있다. 이 흐름에서 보면 지난해 11월 10일의 대청해전은 그 신호탄이었다. 서해의 분쟁 수역화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패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이후 북한은 NLL 쪽으로 전투기를 발진시켜 우리 군 당국을 긴장시키더니 12월 21일엔 NLL 이남의 우리 수역을 평시 사격구역으로 선포했다. 총성 없는 도발이었다.

지난 10일 북한의 평화협정 회담 제의는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25일의 NLL 이남 항행 금지구역 설정이나 26일의 전투기 발진과 27~28일 해안포 사격도 정전체제의 불안정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이 행보의 실질적 사령탑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일 수밖에 없다. 군사작전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와 대미 관계의 전략까지 조정한다고 봐야 한다.

북한이 서해상에서 포를 발사한 27일 판문점에서 유엔사와 실무 접촉을 하고 “미군 유해 발굴을 재개하자”고 제안한 것은 북한의 전형적인 통미봉남(通美封南) 전술로 보인다. 북한은 2005년부터 유지해 온 미 국민에 대한 여행제한 조치도 해제했다고 미국의 북한 전문 여행사인 ‘아시아·태평양여행사’가 27일(현지시간) 밝혔다. 대미 유화 제스처는 평화협정 회담 기반 조성의 일환일 수 있다.

해안포 사격도 치밀하게 준비된 인상이다. 북한은 NLL을 넘지 않게 해안포를 사격했다. 25일 선포한 항행 금지구역에는 NLL 안쪽 우리 수역이 포함되지만 북한은 NLL을 넘기지 않았다. 넘겼을 경우의 파장을 우려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군의 대응이나 남북 관계를 저울질한 듯하다. 한 예비역 장성은 “북한이 NLL을 넘지 않도록 해안포를 사격한 것은 과거 행태로 볼 때 매우 절제된 것”이라며 “국제사회를 의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은 그러면서도 대남 심리전을 최고조로 활용하려 했다. 사격 때는 여러 지역의 해안포를 종류별로 동원해 항행 금지구역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야포로 일정 지역을 집중 타격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탄막 사격’이다. 그 구역 속에 남측 해군 함정이 있으면 격침될 수 있다는 협박이기도 하다. 북한이 전방에 300여 문 배치돼 있는 구경 170㎜ 자주포와 240㎜ 방사포를 이번에 쏜 것도 한 맥락이다. 이들 포는 남한의 주요 도시와 군사시설을 표적으로 삼는다. 남측에 대해 심리적 위협을 주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통일부, 개성회담 대표단 명단 통보=통일부는 다음 달 1일 개성공단에서 열릴 공단 관련 실무회담에 참석할 우리 측 명단을 통보했다. 개성공단관리위를 통해 전달된 인원은 김영탁 통일부 상근회담 대표를 비롯한 3명의 대표와 지원 인력 등 17명이다. 명단 통보는 북한의 서해 NLL 수역 해안포 도발에도 불구하고 당국 대화와 경협·지원은 지속한다는 정부 방침에 따른 것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회담이 다음 주 월요일로 잡힌 만큼 북한이 주말까지 회신을 해 올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북한은 명단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해안포 사격 등 최근 상황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이날 간부회의에서 “북한이 추가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한 실무회담과 옥수수 대북 지원 등을 차질 없이 이행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관계자는 전했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이영종 기자



북, 왜 해안포 도발인가

북한군이 이틀째 해안포 등 각종 야포로 서해 전역에 사격을 가하고 있지만 다른 무기 체계는 가동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함정 기동이나 단거리 미사일 발사는 포착되지 않았다.

북한이 해안포 사격이라는 새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마땅한 무력 시위 대안이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군은 최근 남북 해군 간 교전에서 여러 차례 참패를 당했다. 1999년 1차 연평해전에서는 먼저 사격을 하고도 경비정이 침몰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북한 해군은 2002년의 2차 연평해전에서도 기습 작전으로 우리 고속정을 침몰시켰지만 우리보다 더 큰 피해를 봤다. 지난해 대청해전에서도 북한 해군은 대패했다. 이 때문에 북한 해군은 남한 함정을 보면 “겁난다”는 말을 할 정도라고 군 관계자가 전했다. 남측 함정이 북한에 비해 월등히 우수해서다. 남북 함정의 능력 격차로 함정을 기동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북한이 지대함 또는 함대함 미사일로 해상 사격을 하는 것은 해안포보다는 상황이 복잡하다. 미사일은 백령도와 대청도 동쪽에 설정된 항행 금지구역으로 발사하기에는 사거리가 길다. 우리 해역에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남측으로부터 대응사격을 받고 확전될 소지도 있다. 북한이 원하지 않는 길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해안포는 제한된 해상구역 내에 원격사격이 가능하다. 북측 수역에 떨어지면 남측이 대응할 도리가 없다. 대신 사격구역인 항행 금지구역을 남측까지 걸쳐 놓아 심리적인 효과를 극대화한 측면도 없지 않다. 북한이 해안포와 더불어 장사정포까지 쏜 것은 그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사정포의 사정거리에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대부분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 수백 발의 포탄 가운데 한두 발을 남측 해역에 떨어뜨려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남한 내부의 혼란을 부추길 수도 있다.

이번 대규모 포 사격은 해외 수출을 위한 탄약 실험일 수도 있다. 북한은 옛 소련제 포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같은 종류의 포를 보유한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 수출이 가능하다. 북한은 무기 수출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 속에서도 비밀리에 판매를 추진하다 수차례 발각된 적이 있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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