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천수이 '길들이 귀를 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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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낮에도 별이 뜨고

강물에 얹혀 달이 흐릅니다

구름이 몸을 숨깁니다

바람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나뭇잎들 흔들리며 울고 웃습니다

상처난 구멍들이 뒤척이는 잎에

배꼽처럼 박혀 있습니다

뚫린 구멍마다

하늘이 가득합니다

베어져 쓰러진 나무들 둥치에서

엷게 진하게 얼룩진 나이테를

줄 선 길을 따라 봅니다

길 위의 길들이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있습니다

- 천수이(55) '길들이 귀를 열고' 중

날마다 걷는 낯익은 길, 항상 열려 있는 길이 있는 세상, 그러나 길은 날마다 낯설기도 하고 또한 언제나 닫혀 있는 것, 오늘 천수이는 그 길 위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삘기처럼 뽑아 상큼한 물을 입안에 적신다. 나뭇잎에 뚫린 구멍에 가득한 하늘, 쓰러진 나무둥치에 얼룩진 나이테. 길 위에서 귀를 열고 있는 길들이 있어 오가는 계절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다.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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