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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재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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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호 33면

지진으로 호된 시련을 겪고 있는 아이티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우선, 식민지 노예들이 자유를 위해 봉기해 독립과 해방을 동시에 쟁취한 세계 유일의 나라다. 남미 최초의 독립국가다. 아메리카 대륙에선 미국에 이어 두 번째였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뒤 흑인들 손으로 운영한 첫 국가이기도 하다. 흑인들이 공화국을 세운 것도 처음이다.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아이티의 독립 정신은 곧 프랑스 혁명 정신이다. 1789년 혁명 당시의 자유·평등·박애라는 구호가 멀리 카리브해 연안 식민지까지 전해졌다. 이 식민지에선 4만여 명의 백인과 2만8000여 명의 자유유색인(대부분 흑백 혼혈)이 400만 명의 흑인 노예를 억누르고 있었다.

노예들은 1791년 8월에 봉기해 12년을 넘게 싸워 1804년 1월 1일 뜻을 이뤘다. 그들은 프랑스 군대와는 물론, 이웃한 도미니카공화국의 스페인 식민주의자들과도 싸웠다. 도미니카의 노예 해방을 위해서였다. 영토 욕심을 보인 영국군과도 전투를 벌였다. 수십만 명의 흑인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군 전사자는 5만7000여 명에 이르렀다. 식민지 거주 민간인도 2만5000명 넘게 숨졌다. 프랑스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은 결국 군대를 철수했다. 식민지의 백인과 자유유색인은 미국 루이지애나 등으로 떠났다. 역사는 이를 ‘아이티 혁명’이라 부른다.

작은 독립국 아이티는 세계사의 커다란 흐름을 바꿔놓았다. 우선 노예제 폐지의 기폭제를 제공했다. 아이티 독립을 본 영국은 1807년 노예무역을 금했고 1833년엔 아예 노예제 자체를 폐지했다. 프랑스도 뒤를 따랐다.

아이티는 미국 노예들에게 삶의 터전도 제공했다. 1824년 미국이 해외로 내보낸 노예 6000여 명의 이민을 받아 살 곳을 제공했다.

게다가 스페인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의 탈식민주의를 촉발했다. 독립 모범 사례를 제시한 데서 그치지 않았다. 남미 독립운동가인 시몬 볼리바르에게 1815년부터 무기와 돈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는 콜롬비아·베네수엘라·에콰도르·페루의 독립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이 작은 나라가 특산물인 설탕·커피·인디고염료를 팔아 번 돈으로 세계사적 책무를 다한 것이다.

문제는 건국 뒤 200여 년 동안 쿠데타가 32차례나 발발하는 등 국내 정정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는 점이다. 초대 국가원수인 장 자크 드살린은 독립한 그해 9월 공화정을 폐지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독재를 펴던 그는 2년 뒤 암살당했다. 독립 영웅인 앙리 크리스토프는 1807년 2월 나라를 남북으로 나눈 데 이어 3년 뒤 국왕에 올랐다. 그는 1820년 10월 쿠데타 조짐이 있자 은제 탄환을 장전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로도 제대로 된 지도자나 국가 비전 없이 혼란을 겪다 오늘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주민들은 외국 기자만 보면 “제발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이 비극적인 나라를 어디서부터 도와야 할까. 국제사회와 함께 한국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쓰러진 나라에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는 건 세계사적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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