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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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4. 짧은 영어로 고생

영어를 못해 생긴 유학시절 에피소드는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미국에 도착한지 1년 정도 지나 금발의 미국인 여학생을 사귀게 됐다. 부친이 피아니스트인 매리란 미생물학도로 대학원 수업을 같이 듣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인에게 동양인은 생소한 존재였다. 어쩌다 미니애폴리스 시내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면 옆에 있던 여인네들이 마치 못볼 것을 본듯 화들짝놀라 달아나곤 했을 정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극히 좋지 않아 한국인 동료들과 맥주라도 마시고 있으면 '잽스(japs-일본놈이란 속어)' 란 백인들의 비아냥거림이 귓전을 때리곤 했다.

그러나 매리와 난 친한 급우가 되어 서로를 집으로 초대할 정도가 되었다. 문제는 나의 영어실력이었다.

한번은 목요일 쯤인가 매리가 'next sunday' 에 자기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를 사전 그대로 해석해 '다음주 일요일' 로 알고 3일후 다가오는 이른바 '이번주 일요일' 은 아닌 줄 알았다

마음놓고 교회에 다녀왔더니 당시 같이 자취를 했던 해부학의 김재남이 말하길 매리가 집에 찾아와 1시간이나 기다리다 갔다는 것이 아닌가.

알고 봤더니 영어로 'next sunday' 는 통상 바로 다가오는 일요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처럼 서투른 영어로 불필요한 오해를 산데다 동양식 여필종부(女必從夫) 등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매리와 나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미네소타대학엔 우리 조교들 뿐 아니라 필자보다 7년 선배이며 서울대총장을 지낸 권이혁(權彛赫)교수가 보건학 석사과정을 다니고 있었다.

권교수는 서울의대 졸업후 경기도 연천 미군 10군단 병원에서 근무하다 도미한 탓인지 영어실력이 상당히 유창해 보였다.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 모양 가만히 있는데 권교수는 백인들과 당당히 대화에 끼어들곤 해 우리를 기죽이곤 했다. 권교수와 나는 역학(疫學)과목을 같이 수강했다. 이 강좌엔 모두 30명이 수강했는데 나와 권교수 외에 일본인, 중국인, 인도인이 한명씩 있었다.

어느날 역학강의시간에 강의실에 도착해보니 나와 권교수, 일본인 외에 아무도 없었다. 30분이 지나도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느낀 내가 부리나케 교무과에 달려가 알아보니 글쎄 담당교수의 해외학회 참석으로 휴강이라지 않는가.

바로 전 강의때 교수가 분명히 자신의 휴강을 이야기했고 인도인과 중국인을 포함해 모두 알아들었는데 우리 세 명, 그것도 영어에 유창한 것으로 알려진 권교수마저 못 알아들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하이' 이야기도 있다. 이상하게도 그 당시 콘사이스엔 미국인들이 잘 쓰는 인사말인 'Hi' 가 없었다. 식자층이랄 수 있는 우리 일행도 'Hi' 를 '히' 로 발음하거나 인사말이 아닌 웃음을 묘사하는 의성어 쯤으로 알 정도였다.

어느날 동료조교인 약리학의 임정규가 나에게 하소연했다. 서울대 약리학교실에서 자신의 스승인 오진섭주임교수가 미네소타대학으로 왔는데 복도에서 오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오교수 뒤를 따라오던 미국인 동료에게 '하이' 라고 인사한 것이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오교수는 한참 제자인 임정규가 자신에게 손을 치켜들며 하이라고 외쳤다며 매우 건방진 놈이라며 두고두고 불쾌해했다는 것이다.

당시 의과대학에선 사제간에 엄격한 도제문화가 있어 스승에게 건방지다는 이야길 듣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오교수왈 '헬로' 가 스승에게 해야 하는 점잖은 인사며 '하이' 는 동료나 후배에게 하는 인사인줄 잘못 알고 오해했다는 것이 아닌가.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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