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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그렇게 인색해서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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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로스앤젤레스 날씨답지 않게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다. 폐허로 변한 한인타운의 을씨년스런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방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왜 이런 일이 한국 상점에 일어났을까.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애써온 한국동포에게. 우린 그날 온종일 이 숙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설렁탕을 맛있게 들고 난 히스패닉계 목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박사, 당신 보고서에 이 말은 잊지 말고 넣으시오. 빈민촌 아이들이 한국 가게를 약탈.방화하면서 왜 콜라를 훔쳐 마시고 신발을 훔쳐 신었는지. "

땀 범벅이 된 아이들이 거리에서 농구를 한다. 맨발로. 하지만 그 가게에선 콜라 한병 나눠준 적이 없다.

유행 지난 신발이야 몇푼 하지도 않는데. 빈민촌에서 돈을 벌면서 그 이웃에 인심 한번 쓴 적이 없다. 그리곤 얼마나 깔보고 무시하는지.

'우린 너무 인색하다'. 이게 내가 내린 딱한 결론이다. 손해 보는 짓은 않는다. 이대로 가면 우린 세계고아가 된다. 이미 그런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난번 국제통화기금(IMF)위기. 우린 정말이지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세계 어느 누가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었던가.

지구상 어느 나라도 국제사회에 우리 입장을 대변, 옹호해주지 않았다. 동정은커녕 오히려 쾌재를 부른 나라도 있었다.

우린 이 냉엄한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한때 우리에게도 고마운 우방이 많았다. 한국전쟁 때는 총칼을 들고 달려와 목숨을 바쳐 지켜준 우방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땐 한국을 잘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 이 말도 그날 밤 LA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다. 비수에 찔린 듯 아팠지만 아무 항변도 할 수 없었다.

건국 이래 지난 반세기. 우린 많은 우방을 실망시켰다. 배신했다는 표현이 옳다.

이웃 대만만 해도 그렇다. 독립투사만인가. 임시정부 수립에서 한국 독립까지 대만이 보여준 우의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다.

그런 우방을 하루아침에 한마디 양해도 없이 외교단절을 했다. 대세에 밀려서라지만, 그래도 사절을 보내 이해를 구했어야 했다. 아, 대만의 그 뼈아픈 배신감은 언제나 풀릴까.

득 되는 일이라면 우리에겐 신의도 없다. 그렇게 약아빠지고 인색하거든 유세나 말든지.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는 아예 경멸.무시한다. 1백달러짜리 흔들어대며 얼마나 거들먹거렸던가.

외국 근로자를 얼마나 학대했으면 이빨을 갈며 돌아갈까. 그들도 자기 나라에선 괜찮은 집 젊은이다.

우리도 그런 아픈 시절을 겪지 않았던가. 형제처럼 따뜻이 대해야 한다. 누구나 기피하는 3D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수출이 이만큼 되는 것도 그들 덕분이다. 감사해야 한다.

그래야 돌아가 친한(親韓) 인사가 돼 한국 PR맨이 되고 우리 상품 세일즈맨도 돼준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철저한 반한(反韓) 인사로 만들어 돌려보내는 우리의 인색함과 우매함이라니.

국민이 이러니 정부도 똑같다. 지난번 터키 대지진 때 우리 정부는 7만달러를 보냈다. 그 인색함에는 할 말을 잃게 된다.

방글라데시가 10만달러를 보냈는데. 그뿐 아니다. 한국전 참전 이래 지금까지 역대 어느 대통령도 터키를 찾아가 고맙단 인사 한번 하지 않은 나라다.

배은망덕이다. 부자나라 서구제국은 뻔질나게 다니면서 바로 그 앞의 터키는 외면해 온 것이다.

왜냐고? 손해볼 것 같아서다. 외교 문외한이 이런 악담을 한다고 불만이거든 외무 당국자의 해명이라도 한마디 들려주시구려. 그래, 까짓 의리니 하는 건 접어두자. 터키는 해마다 1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내는 황금시장이다.

이젠 구멍가게도 고객을 감동시켜야 장사가 된다. 터키와 교역하는 회사만도 수백개는 될 텐데 지진 때 민간모금하는 동안 누구 하나 얼굴을 내민 회사는 없었다. 우리의 모금활동이 터키TV에 방영되자, "역시 한국은 혈맹의 형제국이다." 깊은 감동을 터키인의 가슴에 심었으니 앞으로 장사는 더 잘 될 것이다.

10월 13일, 터키의 한국참전기념일에 35명의 노병이 재향군인회 초청으로 내한한다. 몇 안되는 가정이 한국 국민을 대신해서 꽃과 선물, 만찬을 베푸는 감사의 장이 마련된다. 이름하여 '국민감사의 밤' 이다. 이런 '바보' 도 있기에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렇게 인색하고 약아빠져서야 장사 해먹기는 글렀다.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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