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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경협 국제학술회의] 下. 전문가 좌담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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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남북경협 국제학술회의 이틀째 행사로 10일 스탠퍼드대 엔시나 홀에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선 스탠퍼드대 객원연구원인 서상목(徐相穆)전의원과 드와이트 퍼킨스 하버드대 교수,브래들리 뱁슨 세계은행 북한담당 선임자문관이 패널리스트로 참석해 북한 경제의 장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참석자들은 북한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과정에 들어섰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북한 지도부가 급격한 변화를 버티지 못하고 개혁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서상목(사회)=회의에 참석한 전문가들 대부분이 북한의 변화의지에 대해 낙관하는 것 같다.북한의 변화의지를 어떻게 평가하나.

뱁슨=북한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정에 돌입했다.변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골격을 정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최근 중앙은행과 경제정책 책임자를 교체한 것도 이런 변화의 일환이다.

퍼킨스=북한이 서방세계와 접촉을 확대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시작이다.하지만 북한이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구체적인 구상이 있는지 회의적이다.변화와 개방에 따를 위험성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을 경우 어렵게 선택한 변화의 길을 포기하는 상황도 나올 수 있다.

서=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변화를 원만하게 추진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과거 중국과 베트남 등에 비해 북한 사정은 훨씬 열악하다.중국은 농업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 상대적으로 개혁의 높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그러나 북한은 공업분야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과거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 유사하다.중국은 점진적 개혁이 가능했지만 동구권 국가들은 소위 ‘빅 뱅’으로 갔다.북한의 경우는 과연 어떨까.

퍼킨스=북한의 공업기반은 대부분 무기관련 산업일 뿐이다.따라서 북한은 ‘빅 뱅’이 아니라 (시장경제로의)점진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본다.시장경제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적극 배우고 특별 가공지역 등을 설정해 교역을 통한 고성장을 노리는 정책을 택하는 게 북한의 생존전략으로서 적합할 것이다.

뱁슨=북한 경제는 이미 붕괴되기 시작했다.각 분야의 위축이 한계상황에 도달했다.다만 중국과 일본 등이 북한경제의 장래에 차지하는 비중을 과소평가하면 안된다.특히 북·일 정상화를 통한 일본의 대북한 배상금과 일본시장 및 자본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 북한경제의 장래에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한국민의 유교전통 등은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 다른 점이고 북한의 노동력은 이미 새로운 투자를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수출지향적 경제 회생전략을 통해 북한 경제를 세계경제에 접목시키고 외자를 유치할 기반을 다지는 편이 북한에 유리하다.

서=북한 경제가 당면할 문제점을 시장과 자본이란 두 분야로 나눠보자.남북간 거래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북한산 상품을 해외에 수출할 경우 중국이나 베트남과의 경쟁이 불가피하다.외국자본이 북한의 수출지향 전략에 관심을 가질지 의문이다.

뱁슨=남북간 거래는 상호보완적 상황의 전형이다.북한의 저렴하고 숙달된 노동력과 한국의 기술 및 국제시장에 대한 지식과 접근능력의 결합은 상당히 큰 힘이 될 것이다.북한의 광산업은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관심을 보이는 분야다.

퍼킨스=결국 한국의 기술과 시장,기업들 역량이 북한 경제의 장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한국 기업들이 사실상 북한 경제를 운용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북한은 과거 중국이나 베트남에 비해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게다가 북한 제품의 대미수출은 적어도 현시점에선 미국내 법에 따라 차별 대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뱁슨=북한 인민들 소비수준은 세계 최저에 가깝다.여건만 허락하면 시장경제가 뿌리내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말이다.

서=공공부문 투자가 북한의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분야다.여타 경제지표가 긍정적인 중국조차도 공공분야 개혁과 투자방식에선 문제가 있다.

퍼킨스=북한은 사기업 활동이나 공공 분야의 체계적 투자에 대한 경험과 기반이 없다.한국인들의 경우 일단 지도자가 결정하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추진력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하지만 북한은 단기간내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정치·사회적 부작용이 두드러지면 새로운 경제운용 방식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

서=북한이 결국 국제금융기구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불가피하다고 보는데.

퍼킨스=북한이 사회 간접자본 투자를 어느 정도로 추진하고 어느 분야에 먼저 손을 댈지를 결정하고 나면 한국이 끼어들 여지도 있다고 본다.북한은 그리 큰 나라는 아니다.(북한 지도자들이)마음만 먹으면 북한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서=북한이 서방세계의 재정지원을 필요로 하고 변화의 의지가 있다면 왜 국제금융기구가 요구하는 전제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데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가.

뱁슨=국제 금융기구의 역할은 우선 북측의 경제실태를 관찰하고 경제성장에 필요한 기술과 방법을 자문하는 데 있다.

그러나 재정지원엔 정치적 고려가 따른다.아시아개발은행(ADB)이나 국제통화기금(IMF) 등에서 차지하는 미국과 일본의 막강한 지분과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북한을 지원하려면 먼저 군사·안보적 측면을 고려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이 국제사회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개선하면 국제 금융기구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게 훨씬 쉬워질 것이다.

퍼킨스=북한이 서방세계 전문가들의 견해를 경청하고 자문을 받으면서 점진적으로 체제를 유연하게 만들어 나갈 의지가 있다면 서방세계는 북한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이 현재 그런 시점에 와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80년대말과 90년대 초 베트남은 서방 세계와의 접촉을 급속히 확대하고 자국의 관리와 기업인 등 다양한 인사들을 외국에 파견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흡수하도록 했다.이런 노력들이 베트남의 변화 의지를 외부에 과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서=북한에겐 한국이 존재한다는 게 다른 나라들 경우와 크게 다를 것이다.한국은 북한 경제의 장래에 큰 힘이 될 수 있다.

팰러 앨토(캘리포니아주)=길정우·신중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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