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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며…] 동녘 하늘에 번지는 들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새벽 3시 반. 침상마다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부스럭거린다. 눈을 떠야겠는데 신발 바닥에 묻은 껌처럼 졸음이 쩍쩍 달라붙는다. 천왕봉의 해돋이?

그까짓 것…. 아니지, 지리산 능선의 백리길을 걸으며 해돋이를 볼 수 있을까 내내 걱정한 게 아깝잖은가.

할 수 없이 일어선다. 밖으로 나가려니 발 디딜 틈이 안 보인다. 장터목 산장의 바닥에, 신발장 앞의 통로에, 그리고 입구 계단에까지 등산객들이 누워 있다. 빈틈이 없도록 해돋이의 꿈을 조각 맞추기 한 채, 그들은 새벽을 기다렸다.

돌길을 전등으로 밝히며 줄지어 오른다. 숲을 벗어나자 제석봉이다. 껑충한 실루엣의 모습들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 을 이어가는 고사목, 아니 불타 죽은 구상나무들이다.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핑, 돈다.

오리온.카시오페이아.북두칠성.거문고.전갈, 그리고 은하수…. 온 하늘에 별들이 초롱초롱하다.

문득 들여다보고 싶다. 옆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의 눈동자 속에서 반짝거릴 별빛을. 또 유성처럼 내 가슴을 가로지를 그의 눈빛을. 제석봉을 내려가는 돌길이 제법 험하다.

돌부리며 나뭇가지며 조심하라는 당부를, 앞선 사람이 일일이 뒤로 전한다. 전등이 없는 사람의 발 밑을, 앞뒤 사람이 밝혀 준다. 아빠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큰아들은 엄마의 손을 끌고 어둠길을 짚어 간다.

어둑새벽에 서로의 모습이 분간이 안 가듯, 마음의 경계도 사라진다. 삼대가 적선(積善)을 해야 본다는 해돋이를 못 봐도 아쉬울 것이 없겠다.

통천문이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고 지나가야 한다. 이때껏 짙었던 어둠이 한꺼풀 벗겨지며 사방이 희붐하다. 서늘한 바람이 계속 어둠을 등뒤로 실어 나른다.

멀리서 해돋이의 진통이 시작된 걸까. 1시간 10분만에 천왕봉에 올랐다. 사람들이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며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바위 봉우리가 사람 봉우리로 변했다.

어렵사리 틈을 비집고 서자 몰아치는 새벽바람에 얼굴이 얼어붙는다. 몸을 옹송그리고 동녘을 응시한다. 하늘이 희끔하지만 아직 해는 뜨지 않는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도하듯 40여분 동안 정동(正東)에 염원을 모은다. 하늘이 서서히 붉어진다. 천왕봉 아래에선 뭉실뭉실한 구름장이 하봉 능선을 타고 사르르 넘기 시작한다.

"떴다!" 환호성이 터졌다. 이글이글 샛노란 불잉걸이 떠오른다. 드넓은 동녘 하늘에 들불이 번진다. 두 눈이 덴 듯 욱신욱신하다. 숨을 몰아 뻘건 불꼬리를 후루룩 삼킨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어둠을 사른다.

홧홧, 마음이 달아오른다. 일출의 도가니에 '나' 마저 쏘시개로 던져 넣고 싶다. 그리하여 너나없이 우리는 꽃불을 옮기는 불꾸러미가 되고자.

배두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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