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영국의 '인질 구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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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병상 런던 특파원

영국인 케네스 비글리(62)를 살리기 위해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비글리는 김선일씨를 참수한 이라크의 무장단체 '일신과 성전'에 3주째 잡혀 있다. 그가 풀려날 가능성이 크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범죄집단에 납치된 경우엔 돈을 내고 석방되기도 하지만 일신과 성전 같은 과격 무슬림 단체가 참수를 예고해 놓고 그냥 풀어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그의 석방의 가능성을 높여준 사람은 아일랜드 외무장관이다.

아일랜드는 중립국이다. 미국 덕에 잘 사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미국의 참전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비글리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래서 비글리 가족은 아일랜드 정부에 "석방에 도움이 되도록 비글리에게 아일랜드 여권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아일랜드 국적을 인정해 달라는 얘기다. 아일랜드 외무장관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라며 여권을 만들어줬다.

협상 과정에서 아일랜드 여권이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사람은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리비아 카다피 원수의 아들)다. 중재인을 통해 무장단체와 직접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카다피는 "필요하면 몸값을 내가 내겠다"며 적극적이다. 카다피는 아버지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아랍권 내에서 발언권이 없지 않다. 또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과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 등 아랍권의 거물들도 비글리를 돕겠다고 나선 지 오래다.

영국 정부는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카다피 등의 노력이 영국의 보이지 않는 외교력임은 분명하다. 영국은 지난 수년간 카다피와의 비밀 협상 끝에 리비아와 미국의 화해를 성사시켰다. 리비아로서는 영국이 국제사회 복귀의 은인이다. 아일랜드는 영국과 뗄 수 없는 이웃이자 북아일랜드 분쟁 해결의 동반자다. 아라파트에게 영국은 미국을 업고 질주하는 이스라엘을 견제해 주는 중요한 후원자다. 국제사회에서도 공짜는 없다. 영국의 외교력은 곧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궁극적으로는 국력이다. 김선일씨의 목숨이 비글리의 목숨보다 덜 소중했던 게 절대 아니다.

오병상 런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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