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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수의 세상 읽기

엄동설한에 쌀 풍년을 걱정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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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농경사회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인 데다 최근에는 과학적으로도 그 인과관계가 입증되었다니 더욱 믿을 만하다. 매서운 겨울 한파도 농작물의 병충해를 막는 데 한몫을 한다고 한다. 올겨울은 유난히 눈도 많고 추위도 심하다. 속설대로라면 올해 농사는 대풍이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폭설과 한파로 고생이 많지만 그래도 풍년이 든다니 제법 위안이 된다.

그러나 눈 쌓인 벌판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풍년 예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편치 않다. 솔직히 말하면 올해도 대풍이 들까 봐 걱정이 앞선다. 농사가 풍년이라는데 웬 심통이냐고 하겠지만 내 눈에는 그 벌판에서 지난해 가을에 농민들이 트랙터로 논을 갈아엎던 장면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풍년이 예상된다지만 실은 지난해에도, 그리고 그 전 해에도 쌀 농사는 대풍이었다. 쌀 농사가 풍년인 가을이면 으레 벌어지는 행사가 ‘논 갈아엎기’다. 지난해 가을에도 전국 10여 곳에서 농민들이 논을 갈아엎었다.

TV 화면에 비친 농민들의 울분은 처절했다. 누렇게 잘 익은 벼가 순식간에 쓰러지고, ‘쌀값 보장’이란 머리띠를 두른 농민 한 사람이 카메라 앞에 서서 분통을 터뜨린다. “오죽 답답하면 1년 내내 자식처럼 정성껏 보살피고 키운 나락을 내팽개치겠느냐”며 “쌀값은 자꾸 떨어지는데 정부는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진다”고 절규한다. 다른 농민은 “지난해 수확한 벼를 아직도 팔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놓고 있다”며 “정부의 개방농정에 농민들이 설 곳을 잃었다”고 정부를 원망했다. 이윽고 한 농민단체장이 나서 “풍년 농사를 기원해야 할 농민들이 쌀값을 올리기 위해 흉년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며 농민들의 애타는 심정을 전했다.

참으로 딱하고 처연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여기다 무지막지한 트랙터 바퀴 아래 속절없이 쓰러지는 벼와 낙심한 농민의 표정이 화면에 클로즈업되면 누구라도 동정심이 일어날 만하다. 그러나 일각에선 “매년 쌀 수확기마다 으레 벌어지는 ‘200만원짜리 쇼’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한 번에 갈아엎는 논의 면적이 대략 2000㎡(600평) 정도로 금액으로는 200만원어치쯤 된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이렇게라도 절박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논을 갈아엎는 처절한 모습이 보도돼 쌀값을 올릴 수 있다면 그 효과는 200만원에 비할 게 아니라는 계산이다.

문제는 ‘논 갈아엎기’가 쇼든 아니든 간에 그것으로 쌀 풍작의 비극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쌀 농사가 풍년이 들수록 쌀 농가의 수익은 줄어들게 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쌀시장은 공급에 비해 수요가 적어진 지 오래다. 그대로 두면 쌀값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실 우리나라의 벼 경작 면적과 쌀 생산량은 추세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쌀 소비량이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어 공급초과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다. 풍작이 들면 쌀값의 하락 폭은 더 커진다. 정부가 수확기에 쌀의 일부를 사들이고, 식용 이외의 쌀 소비를 늘려 보겠다지만 쌀값 하락의 대세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다.

급기야 농민단체들은 대북 쌀 지원을 재개하고, 대북지원용 쌀 수매를 제도화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쌀 농가의 수익 보전 요구와 일부 농민단체의 친북성향이 엉뚱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쌀값을 올리기 위해 대북 쌀 지원을 재개하자는 주장은 터무니없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쌀값을 떠받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쌀 수급의 불균형이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법은 한 가지다. 수요가 주는 만큼 공급을 줄이는 것이다. 일각에선 우리의 주곡인 쌀의 특수성을 감안해서라도 쌀 경작 면적을 줄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쌀이 아무리 특수해도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원리를 언제까지나 거스를 수는 없다. 농민들이 생산만 하면 정부가 의무적으로 쌀을 사주던 과거의 추곡수매제로 돌아갈 수도 없거니와 강제로 국민들의 쌀 소비를 늘릴 방법도 없다. 쌀값 하락으로 인한 농민들의 고통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정부가 쌀 값을 보장하라는 요구는 더 이상 통할 수 없다. 그런 식이라면 팔리지 않는 물건을 무조건 사달라는 자영업자도 봐줘야 할 것이고, 싣고 갈 화물을 내놓으라며 길을 막는 화물연대의 요구도 들어줘야 한다. 어떤 상품이든 가격을 떠받치려면 다 돈이 들고, 그 돈은 국민들의 세금이다. 쌀 생산을 줄이지 않고 쌀 값을 보장하란 얘기는 다른 국민들의 돈을 내놓으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는 농민들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수익성을 따져 경작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다른 상품과는 달리 쌀에 대해서는 경작하지 않는 대가로 직불금까지 주고 있지 않은가. 여기다 정부는 쌀 이외의 대체작물을 심을 경우에 지원을 늘리는 방안까지 강구하고 있다고 한다. 쌀 농가에 대한 특별 대우다. 쌀 농가들은 올 모내기 철이 되기 전에 미리미리 올해 쌀 농사를 지을지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바란다. 올가을에 또다시 논을 갈아엎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와 함께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쌀 관세화를 앞당기는 일이다. 쌀 관세화란 높은 관세를 물려 쌀 수입을 개방하자는 것이다. 지금은 관세화하지 않는 대신 의무적으로 쌀 도입 물량을 늘려 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실은 관세를 매겨 쌀을 수입하나, 의무적으로 도입하나 어차피 외국 쌀이 국내에 들어오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쌀 시장 개방이란 금기(禁忌)를 피하려고 선택한 의무 도입 방식이 지금은 국내 쌀값 하락에 더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됐다. 관세화를 택하면 수입을 안 할 수도 있지만 의무도입은 선택의 여지없이 매년 더 많은 쌀을 들여와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생산량만으로도 쌀이 남아도는데 의무도입 물량까지 늘어나니 쌀 농가로선 죽을 맛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농민들로선 당연히 관세화를 선택해야 마땅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일부 농민단체들은 “미국 쌀 수입은 안 된다”며 관세화 논의 자체를 반대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쌀 농가의 이익보다 이념이 더 중요한 모양이다.

‘쌀 풍작’ 걱정에 ‘수입 쌀’ 걱정까지 하다 보니 겨울 해가 짧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