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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가 떴던 90년대가 좋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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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세월은 맞수를 친구로 바꿔놓았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마주봤던 신영철과 나카가이치가 모처럼 나란히 앉아 옛 얘기를 나눴다.

일본 배구의 마지막 수퍼 에이스. 1990년대 일본 배구의 간판이었던 나카가이치 유이치(36)에 대한 수식어다. 그가 활약하던 90년대 초.중반 남자배구 한.일전은 최고 흥행카드였다. 신진식의 유연함과 이경수의 강타를 겸비한 그는 한국 입장에선 눈엣가시였다. 그런 나카가이치도 두려운 상대가 있었다. 신영철(40) LG화재 감독이다. 91, 94년 배구 월드리그 세터상 수상자. 그의 토스는 늘 일본의 방공망을 초토화했다.

지난 6월 26년간의 선수생활을 접고 일본 V리그 사카이 블레이저스의 감독이 된 나카가이치가 전지훈련차 신 감독의 LG화재를 찾았다. 6일 일본으로 돌아가기 앞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달콤했던 90년대의 배구를 반추하면서, 찬바람 부는 2000년대의 배구를 이야기했다.

#한.일전

(나카가이치)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이 기억에 남는다. 그전까지 한국에 연패했는데, 그 경기에서 3-1로 이겼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예선은 한국에 0-3으로 참패했다. 그때 내가 레프트를 봤는데 한국 라이트 김세진의 공격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신영철)90년대에는 한.일전이 정말 많았다. 한.일전 하면 나카가이치부터 생각난다. 당신의 컨디션이 한국의 성적이었다. 92년 아시아선수권(태국) 때 호텔 에어컨이 너무 세 나카가이치가 감기에 걸렸는데, 내가 경험한 한.일전 중 가장 손쉬운 승부였다.

(나카가이치)별 걸 다 기억하네. 우리를 괴롭힌 건 늘 세터 신영철이었다. 우리의 센터블로커는 늘 당신의 토스 반대 쪽으로 뛰었다.

#추억의 선수들

(나카가이치)대표팀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국에 장윤창이 있었다. 그 이후에는 하종화.마낙길.박희상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박희상은 참 좋은 선수다. 우리가 치는 공은 다 받아내는 수비수였는데, 공격도 대단히 잘했다.

(신영철)나카가이치 시절 일본팀 멤버가 좋았다. 오다케.이즈미가와.미나미.오기노.사사키가 생각난다.

#한.일 배구

(나카가이치)일본과 한국의 배구가 많이 침체됐다. 안 좋은 국제무대 성적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제자리인데 다른 나라들이 강해졌다.

(신영철)맞다. 예전엔 명함도 못 내밀던 이란.호주까지 기술배구를 하면서 강호로 떠올랐다. 일본은 용병(외국인 선수)이 각 팀의 주공격수를 맡으면서 특급공격수가 나오지 않게 됐는데 그것도 한 가지 이유다.

(나카가이치)동감이다. 또 하나 한.일 월드컵 축구의 영향도 크다. 월드컵 전후로 학교 운동부의 대세가 배구에서 축구로 바뀌었다. 기존 배구팀도 많이 해체됐다. 팬도 축구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영철)외국인 선수 부작용은 올해 프로리그를 출범시키는 한국이 참고해야 한다.

두 사람의 대담이 있던 날 LG화재 체육관에는 아카가키 요코라는 한 일본 여성팬이 찾아왔다. 10년 전 김세진 때문에 한국배구에 빠진 그는 이후 신 감독의 팬이 됐고, 아예 한국에 건너와 어학 연수 중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나카가이치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 6월 나카가이치 은퇴경기가 열렸는데, 1만엔(약 10만원)짜리 입장권이 발매 직후 매진됐다. 일본인들은 역대 남자배구에 3명의 수퍼 공격수가 있다고 한다. 72년 뮌헨 올림픽 우승 주역 오우코 세지, 그리고 80년대의 다나카 미키야쓰, 그리고 마지막 수퍼 에이스 나카가이치다."

글.사진=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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