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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강기갑 판결문의 ‘기교 사법’ 혐의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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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호 02면

‘기교 사법’이란 말이 있다. 학문적 용어는 아니다. 판사가 미리 결론을 정해 놓고 언어적 기교로 사실과 법리를 꿰맞추는 행태를 풍자한 것이다. ‘국회 폭력’ 혐의로 기소된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남부지법 이동연 판사의 판결문을 읽어 보면 기교 사법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우선 끝없는 분절의 오류다. 날아가는 화살의 궤적을 극한으로 나눌 경우 논리적으로 분절 구간이 무한대여서 화살은 조금도 나아갈 수 없다는 논리적 억지를 부리는 식이다. 이걸 논리학에선 ‘제논의 역설’이라고 한다.

강 의원이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실에 들어가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는 부분에 대한 판결 내용을 보자. 이 판사는 원탁에 올라가 ‘공중부양’ 공격을 했던 강 의원보다 피해자 격인 박 총장의 행동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박 총장이 신문을 보고 있던 ‘40초의 시간’은 공무 수행 중이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판사는 “직무와 관련해 반드시 필요한 내용은 비서가 만든 신문기사 스크랩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크랩 읽는 행위와 신문 읽는 행위를 분절해 하나는 공무이지만 하나는 공무가 아니라는 해괴한 논리다.

둘째,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 의미를 자의적으로 다시 정의해 생기는 오류를 말한다. 이 판사는 강 의원이 경위들을 폭행한 혐의에 대해 “어떠한 유형력을 행사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무죄로 판단했다. “화가 나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한 감정의 표현에 불과하거나 항의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란 것이다. 이런 인식 과정을 거치며 ‘폭행’은 ‘정치적 항의 표시’로, ‘고의’는 ‘과실’로 재정의된다. 폭력 사건은 대부분 흥분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흥분했다고 해서 폭행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폭력배가 처벌을 받을 것인가.

셋째는 논리적 오류 차원을 넘어 마술에 가깝다. 토끼를 마술사 모자 속에 집어넣어 사라져 버리게 한 것이다. 검찰은 사무총장실에서의 공무집행방해 혐의와 별개로 보조탁자를 부순 데 대해 공용물 손상 혐의를 적용했다. “각각 사무총장 공무 수행, 국회 비품에 관한 것으로 별도의 범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판사는 “사무총장을 상대로 이뤄진 일련의 행위로서 공무집행방해에 포함, 흡수되는 것이어서 이 부분은 별도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다음 공무집행방해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부서진 공용물’에 대한 형사책임 문제는 증발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2009년 1월 5일 전 국민이 TV와 인터넷으로 목격했던 국회의 활극은 법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셈이 됐다. 흔히 ‘가위와 풀의 역사’라고들 한다. 잘라지고 붙여짐으로써 맥락이 사라진 역사를 경계한 말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좌우하는 판결까지 가위와 풀로 쓰여진다면 사법 시스템을 지켜 주는 국민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판사들과 사법부가 비상한 각오로 기교 사법의 우려를 씻어 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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