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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설작업 대기 17시간째, 드디어 명령이 떨어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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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호 06면

<1> 15일 새벽 제설차가 눈발이 날리는 광화문광장 주변 도로에 염화칼슘을 뿌리고 있다. <2> 박근범 기사가 제설차 운전석에 앉아 있다. 박 기사는 14일 오후 2시부터 15일 오전 7시 까지 광화문광장 곁에서 제설작업 지시를 기다렸다. <3> 남산에 위치한 서울시 재난안전대책본부 상황실에서 비상대기 중인 직원들. 최정동 기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15일 새벽 들어서만 네 번째다. 앞의 세 번은 5분 정도 오다 그쳤다. 15일 오전 6시30분 서울 광화문광장 건너편 인도 옆에 주차된 3t짜리 제설차 앞좌석에 기자와 나란히 앉은 박근범(50) 기사는 눈이 날리는 하늘을 보며 푸념 조로 내뱉었다. “올 거면 빨리 오든지, 아니면 안 오든지… 이게 몇 번째야.”

눈과 싸우는 제설차 기사, 그들과 함께한 1박2일

20여 분이 지나자 날이 점점 밝아지면서 어둠 속에 있던 광화문 복원공사 현장 가림막의 색깔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6시55분 박씨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네, 네… 알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박씨의 동작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서울시 재난안전 대책본부 상황실에서 제설을 시작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상황실에서는 CCTV와 현장 순찰을 통해 현재 눈 상태를 보고 염화칼슘 살포를 결정했다.

7시5분, 17시간을 기다리던 제설차가 출발했다. “칙칙” “픽픽” 제설기에서 염화칼슘이 도로 위로 뿌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박씨는 8단까지 있는 제설차의 기어를 5단에 고정하고 기어 옆에 있는 4개의 레버 중 세 번째 레버를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겼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는 “이 레버를 몸 쪽으로 당겨놓으면 염화칼슘이 계속 나오는데 지금처럼 눈이 조금 올 때는 조금씩 뿌려야 하므로 양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설차가 염화칼슘을 한 번에 뿌릴 수 있는 범위는 차로 두 개 반 정도다.

그 때문에 광화문광장을 둘러싼 6차로는 두 번에 걸쳐 뿌려야 한다. 길 건너편에도 제설차가 보였다. 박씨의 동료 권희록(50) 기사가 운전하는 15t짜리 제설차였다. 박씨와 권씨의 휴대전화 통화가 이어졌다. 박씨는 “내가 안쪽으로 돌 테니까 바깥쪽으로 돌아요”라며 계속해서 레버를 당겼다.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기어를 변속하고 레버를 잡아당기느라 휴대전화를 들기도 힘들었다. 사이드미러에 도로에 뿌려지는 염화칼슘이 보였다. 마치 연기가 나는 듯 하얀 가루가 바람에 날리며 제설차를 따라왔다. 시속 30㎞ 속도로 광화문광장을 두 바퀴 돌며 염화칼슘을 뿌린 제설차는 광화문을 바라보고 우회전했다. 다른 도로에도 뿌리기 위해서다.

박씨와 권씨는 서울시 북부도로교통사업소에 소속돼 있는데 이 사업소가 담당하는 제설 구간이 광화문과 율곡로, 대학로다. 빨간색, 파란색 경광등을 번쩍이며 사이렌 소리를 내는 제설차가 눈이 가득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출근시간 전에 다 끝내야 하는데….” 박씨가 중얼거렸다. 인도에는 눈을 쓸어내는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연두색 작업복을 입은 환경미화원도 바쁘게 움직였다. 7시40분 모든 구간의 도로에 염화칼슘을 다 뿌린 박씨와 권씨는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 차를 멈추고 잠시 내렸다. “아휴~ 제설은 오늘처럼 해야 돼. 오늘 아주 잘됐네.” 권씨가 웃으며 말했다. 박씨는 “오늘은 미리 작전을 잘 세우고 신속하게 제설을 해서 별 어려움 없이 끝났네”라며 기지개를 켰다.

“10년 째 제설, 4일 같은 폭설은 처음”
눈이 오면 곧바로 제설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박씨가 광화문광장 옆에 진을 친 것은 하루 전인 14일 오후 2시. 목요일 저녁부터 눈이 올 것이란 기상청 예보에 따라 서울시 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내린 1단계 경보에 의한 것이다. 대책본부가 경보를 발령하면 구청·도로교통사업소 등 32개의 산하기관이 비상대기에 들어간다. 예보상 눈의 양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4일 25.8㎝라는 예상치 못한 폭설에 당한 후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대기 중인 박씨는 30분마다 차에 올랐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계속 앉아 있기에는 제설차의 운전석이 좁았다. 그는 “한두 시간 있을 것도 아닌데 미리미리 몸을 풀어놔야 해요”라며 내릴 때마다 스트레칭을 했다. 차 안에는 생수와 쌍화탕도 준비돼 있었다. 평소 박씨의 업무는 도로나 도로 주변의 시설물을 유지·보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매년 겨울에는 제설 업무에 투입되고 있다고 했다.

박씨는 “10년 동안 제설 작업을 했지만 4일 같은 눈은 처음이에요”라며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이나 기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일요일이라 집에서 쉬고 있다가 나오라는 문자를 받고 나왔어요. 그때부터 5일간 집엘 못 들어갔어요.” 당시 박씨는 동부간선도로를 담당했다. 3일 일요일부터 미리 동부간선도로 입구에서 대기했지만 4일 새벽 짧은 시간 동안 워낙 많은 눈이 쏟아져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그를 힘들게 한 건 눈만이 아니었다. 성격 급한 운전자들이 제설차의 발목을 잡는다고 했다. “제설차가 염화칼슘을 뿌릴 때 옆에 차가 있으면 차에 막혀 넓게 퍼지지 않아요. 그런데 꼭 옆으로 끼어드는 차들이 있어 제설이 제대로 안 돼요.”

박씨와 지난 4일 폭설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현장 순찰 중이던 서울시 북부도로교통사업소 정중곤(52) 소장이 박씨의 제설차에 들렀다. 그는 북부 사업소 관할 구역을 돌아다니며 도로상황과 기상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정 소장은 “아무래도 우리가 맡은 광화문이나 대학로가 중심도로이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했다.

“오늘 눈이 온다는 예보를 봤느냐”고 묻자 그는 “솔직히 말해 일기예보는 참고만 한다. 일기예보만 믿다가는 낭패를 당한다”고 말했다. 북부도로교통사업소에는 102명의 직원이 근무하는데 지난 4일 이후 계속해서 2교대로 24시간 근무 중이다. 2개월 전 소장이 된 정 소장은 “올겨울은 참 힘들다”며 “제설할 때 시민들이 협조만 해줘도 절반 이상은 해결된다”고 시민의 협조를 부탁했다.

잠시 후 율곡로와 대학로 제설을 담당하는 동료 권씨가 오늘 제설 작전을 짜기 위해 광화문에 들렀다. 권씨 역시 10년 경력의 베테랑 제설차 운전사였다. 권씨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지난주 월요일(4일)에는 눈한테 졌지…”라고 입을 연 권씨는 “아휴… 광화문에서 다른 차들이랑 같이 갇혀버렸어. 제설차가 가지를 못하는데 어째. 무조건 지는 거지. 차라리 고속도로나 고갯길 같은 데가 제설하긴 편해. 딱 막아놓고 맘대로 뿌리면 되거든.”

권씨는 지난 월요일 황당한 일을 당했다며 목소리를 키웠다. “염화칼슘을 뿌리는데 옆에 있던 외제차 운전자가 차에 흠집 난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라고. 아니, 누구를 위해서 제설을 하는데…. 눈이 오더라도 출퇴근 시간에는 안 왔으면 좋겠는데.”

제설은 남산에서 시작된다
14일 오후 9시30분 기자는 남산에 위치한 서울시 재난안전대책본부에 들렀다. 서울시 제설 업무를 총괄하는 곳이다. 입구에 도착하자 청원경찰이 신분증을 확인했다.

방문표를 받고 금속탐지기를 통과한 후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대책본부 사무실은 모든 119 신고가 처음 접수되는 119 종합상황실 옆에 있었다. 녹색 점퍼를 맞춰 입은 20여 명의 직원이 근무 중인 사무실 분위기는 차분했다. 대부분 서울시 교통 관련 부서 직원들로 비상대기 단계의 예보가 나오자 이곳으로 파견된 직원들이다. 장인규 서울시 도시교통본부 도로관리담당관은 “올해는 참 이상한 해”라면서 “원래 날씨가 추우면 눈이 많이 안 오는데, 올해는 날이 추운데도 눈이 많이 오고, 눈이 오더라도 꼭 러시아워에만 오더라”고 했다. 본부 사무실 가운데에는 길쭉한 원형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는 15대의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크고 작은 CCTV 20여 대가 있어 서해안 지역 5곳과 서울의 주요 도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 담당관은 “지난번에 워낙 크게 당해서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현재 제설차 166대, 염화칼슘 1100t, 3500명의 제설 인원이 대기 중”이라고 말했다. 예보와 달리 눈이 오지 않자 사무실 한편에서 “이러다 양치기 소년 되는 것 아니냐. (눈이) 올 거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시 도로관리팀 이화신 주임은 “같은 눈이라도 함박눈은 금방 녹지만 싸라기눈은 이미 언 상태로 내리기 때문에 잘 안 녹는다”며 “무조건 적설량 몇 ㎝로 판단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도로에서 치운 눈을 쌓아 놓은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지적에 그는 “눈 치우는 것은 구청별로 다르다. 지금까지는 치우는 것이 급선무라서 한곳에 쌓아놓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며 “조만간 용해차(눈 녹이는 장비)를 도입할 계획도 있다”고 밝혔다. 한 시간이 지났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기상청 예보는 여전히 눈 올 확률 70%였다. 하지만 아직 눈은 오지 않았다.

11시 광화문 광장 옆에 대기 중인 박씨의 제설차 앞좌석으로 다시 돌아왔다. 말동무가 생긴 박씨는 기자를 굉장히 반갑게 맞았다. 영하 10도가량 되는 추위에 제설차 안인데도 뜨거운 캔커피가 금세 차가워졌다. 매번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박씨는 “내 가족이 이 도로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죠”라고 말했다. 12시가 넘어가자 광화문 가림막을 비추는 조명이 꺼졌다. 주변 나무들을 장식하던 전구도 함께 어두워졌다. 새벽이 되자 때때로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3시25분, 4시30분, 6시에 굵은 눈이 내렸지만 5분도 안 돼 그쳤다. 6시30분에 눈이 다시 내렸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모든 제설 작업을 마친 15일 금요일 오전 8시30분.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었지만 굵기는 점점 가늘어졌다. 기상청이나 상황실에서도 더 이상 눈은 안 올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박씨는 천천히 제설 구간을 돌며 제설이 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지 살폈다. 눈이 완전히 녹아 드러난 아스팔트의 짙은 회색이 눈으로 하얗게 변한 인도와 대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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