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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값 급등 행진 일단 브레이크 거래량 60% 줄며 차분한 분위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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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호 24면

새해 초부터 외환시장을 출렁였던 원화가치 급등세가 주춤하고 있다. 사진은 14일 오후 외환은행 딜링룸의 차분한 모습.

14일 오전 8시 서울 명동 외환은행 본점 2층. 10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널따란 사무실에는 책상마다 4~5개의 컴퓨터 모니터가 복잡하게 얹혀 있다. 1초에 100만 달러(약 11억원) 단위로 외화를 사고파는 딜링룸이다. 김두현(차장) 선임딜러는 기자가 인사를 건네자 “오늘은 조용할 것 같다”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짓는다.

초 단위 외환거래 현장, 외환은행 딜링룸에 가 보니

외환 거래가 시작되기 직전 간단한 브리핑이 열렸다. “(환율) 하향(원화가치 상승) 압력이 좀 있을 것”이란 내용이다. 오전 9시 서울 외환시장이 열리자마자 사방에서 다각다각 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날 원화가치는 전날 종가보다 3.5원 높은 달러당 1122원에 거래를 시작됐다. 개장 전 브리핑의 예상이 적중한 셈이다.

모니터에 나타난 환율 그래프는 시간이 갈수록 옆으로 기어간다. 위아래 움직임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달러당 1122원에서 1원 남짓 왔다갔다 하는 것이 고작이다. 김 차장은 “어이가 없네”라며 혼잣말을 한다.

낮 12시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외환 딜러들이 하나둘 외투를 챙겨 자리를 뜬다. 김 차장은 옆자리 후배와 함께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그는 “한창 바쁠 때는 점심시간에 아무도 자리를 뜨지 못하지만 오늘은 할 일이 별로 많지 않다”며 “몇 명만 남고 다른 후배들은 나가서 식사하고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김 차장의 예상대로 오후 3시 거래가 마감할 때까지 외환시장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이날 원화가치는 전날보다 4.4원 오른 달러당 1121.1원에 장을 마쳤다. 거래량은 52억7700만 달러로 전날보다 15억5000만 달러 줄었다.
 
일본 경제 침체에도 엔화는 강세
외환시장에서 거래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외환 딜러들은 적극적인 매매를 자제하고 서로 눈치를 보는 상황이다. 환율이 급변동하며 시장 전체가 출렁였던 이달 첫째 주와는 딴판이다.

시장 분위기가 가장 어지러웠던 것은 5일이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거래량은 101억8950만 달러로 지난해 10월 29일(107억7150만 달러) 이후 가장 많았다. 환율의 하루 변동폭은 14원이나 됐다. 반면 15일 거래량은 올 들어 가장 적은 38억9500만 달러에 그쳤다. 열흘 전과 비교해 거래량이 60%나 쪼그라든 것이다. 하루 변동폭은 3.5원에 불과했다.

새해 들어 엿새 연속 이어가던 원화 상승 행진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15일 원화가치는 전날보다 1.9원 내린 달러당 1123원에 마감했다. 그럼에도 지난해 말(달러당 1164.5원)과 비교한 원화 강세는 여전하다. 올 들어 2주간 원화가치 상승폭은 41.5원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올 초 달러 약세, 원화 강세의 주원인을 일단 해외에서 찾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글로벌 달러 약세 흐름이다. 미국 정부가 경기를 살리기 위해 뭉텅이로 돈을 풀었고→이것이 외환시장에서 달러의 공급을 크게 늘려→세계 주요 통화에 대해 달러가 약세를 보이는 것이다.

일본 엔화가 일본 경제의 극심한 침체에도 강세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해 4월만 해도 달러당 100엔대에 머물던 엔화가치는 지난해 11월 말에는 86엔까지 치솟았으며, 현재도 90엔대 초반에서 거래되고 있다. 원화는 그동안 엔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름폭이 덜했다. 최근 원화가치가 급등했다고 해도 아직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 발생 이전 수준(1109원)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글로벌 달러 약세는 세계 금융시장에서 돈의 흐름을 바꿔놨다. 달러 자산을 팔고 대체 투자 대상을 찾는 투자자들이 많아진 것이다. 이런 돈(달러 캐리 트레이드)의 일부가 올 초 한국 등 아시아 신흥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올 들어 인도네시아 루피아(3.1%), 인도 루피(2.2%), 싱가포르 달러(1%) 등도 동반 상승했다.

특히 한국 주식시장에서 외국인들은 최근 2주간 1조4000억원어치를 사들였다. 국채 선물(3년 만기) 시장에서도 2조5000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미국 국채 금리는 10년 만기짜리도 연 3.7% 수준에 불과하지만 한국 국채 금리는 3년 만기가 4.2%대, 10년 만기는 5.3%대로 비교적 높다. 한·미 금리 차에 따른 이익에다 환차익까지 노릴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비교적 건전한 회복세를 보이는 것도 외국인들의 한국 시장 전망을 밝게 했다.

홍승모 신한은행 금융공학센터 차장은 “해외 투자기관들이 투자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며 한국 비중을 크게 늘렸다”며 “최근에는 달러 캐리 자금에 더해 엔화를 팔고 신흥시장에 투자하려는 엔 캐리 트레이드도 재개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주요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속도가 문제이긴 하지만 원화가치는 앞으로 더 오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HSBC은행은 15일 보고서를 통해 “원-달러 환율이 지난해 강력하게 유지됐던 달러당 1150원의 저항선을 뚫고 내려갔다”며 “환율 하락(원화가치 상승)이 부분적으로만 마무리된 것으로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대규모 무역수지 흑자와 통화긴축 전망, 외국인 투자 자금 유입 등으로 원화를 지속적으로 사야 한다는 시장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주장했다. 메릴린치증권은 11일 보고서에서 “경상수지 흑자와 주식·채권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계속되면서 원화 강세를 부추길 것”이라며 “연말 환율이 달러당 1000원까지 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단기적으로는 중국의 움직임이 변수다. 중국 중앙은행(인민은행)은 13일 은행들의 지급준비율을 올리며 시중에 풀린 돈을 조금씩 죄여 나가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이날 국내 시장에선 중국의 영향으로 주가와 원화가치가 모두 떨어졌다.

김두현 외환은행 선임딜러는 “당분간 환율 그래프는 약간 아래쪽에서 옆으로 기어가는 조정 국면을 예상하지만 중국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중국이 혹시 금리를 올리면 달러 캐리 자금이 중국으로 흘러가 환율 하락(원화가치 상승) 압력이 완화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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