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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세계화 위한 기구 필요성 주장한 '문화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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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동구권 붕괴 이후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경제체제 속에서 무한경쟁하게 된 지구촌은 어떤 국가를 막론하고 어쩔 수 없이 세계화 흐름을 탈 수 밖에 없었다.

세계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선택은 새로운 좌절을 초래하기도 했다. 단지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다.

문화적 자존심을 지켜온 유럽은 역사가 일천한 미국의 싸구려 대중문화가 자국의 유구한 문화를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 이 역시 세계화의 또다른 단면이다.

그래서인지 세계화의 환상을 털어버리라는 외침은 유럽 지식인 사이에서 유독 높게 일고 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지 기자들이 몇년전에 쓴 '세계화의 덫' 이 세계화의 허상을 고발하면서 세계화가 몰고 올 암울한 미래를 경고했다면 민족학과 인류학을 전공한 프랑스 파리5대학 장 피에르 바르니에 교수는 '문화의 세계화' 에서 아예 세계화가 허구이며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바르니에의 주장은 세계 어디서나 코카콜라를 마시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볼 수 있는 현실을 비춰볼 때 무모하게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바르니에는 문화란 문화상품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또 그 문화상품이란 것도 일부 산업화된 국가, 혹은 특정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받은 교역의 결과란 점을 강조한다.

결국 문화의 세계화를 운운하는 자체가 넌센스라는 것이다.

문화의 세계화가 일부 지식인의 착각이든 아니든 운송수단.커뮤니케이션의 발달과 더불어 전 지구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고유한 역사를 지닌 각 지역의 특수한 문화는 다국적 기업들이 생산한 각종 문화상품들로 인해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전통문화가 시장법칙에 복종하면서 문화산업은 점점 더 한 곳으로 집중하게 된다. 세계가 코카콜라의 식민지화하고 디즈니랜드 문화가 범람하는 것은 그 반증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1960년대부터 있어 왔고 서구 사회학자들은 융합이론이란 이름으로 이를 체계화했다.

하지만 바르니에는 각 문화의 다양한 능력과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지역 공동체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고 주장한다.

30년 후인 지금 인류는 오히려 문화적 차이를 생산해내고 있음이 목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와 음반의 침투가 각국에서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미국영화가 각국 국민의 감수성에 부응하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출판물은 특히 언어적인 장벽 덕분에 영화나 음반보다 더 잘 저항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각국의 문화정책이다. 무방비 상태로 밀려오는 수퍼파워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고유한 문화를 생산할 것는가의 문제는 상당부분 국가의 역량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는 우르과이라운드에서 시청각물을 '문화적 예외' 로 인정해 GATT협상에서 뺄 것을 주장해 유예기간을 얻어냈다.

물론 여기에 딜레마는 있다. 문화적 예외를 위해 세계의 민주화를 희생할 것인가, 세계의 민주화를 위해 문화적 예외를 희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각국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점이다.

바르니에는 또 문화 시장의 세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지역이라는 두 개의 관점을 결합한 시각이 필요한데, '문명의 충돌' 을 쓴 사뮤엘 헌팅턴을 비롯한 서구 지식인들은 대부분 세계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춰 결정적인 판단 착오를 일으켰다고 말한다.

지역별로 실증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고, 여기에 문화를 받아들이는 주체의 창조.혁신.상상 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생산의 표준화에서 소비의 균질화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는 주장이다.

바르니에는 지역에 대해 제대로 모르면서 행해지는 문화의 세계화에 대한 모든 분석은 편파적인 것일 수 밖에 없고, 더우기 미국화 위험에 대한 논의는 상당 부분 상상 속의 두려움에 불과하다고 결론짓는다.

다시 말해 문화산업과 문화를 혼동하는 것은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것이며, 문화산업의 세계 속에 갇힌 사람들만이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화가 야기할지 모르는 암울한 미래가 갑자기 장밋빛으로 바뀌는 건 아니다.

바르니에는 교역자들이 마지못해 양보한 문화적 예외를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역조직 WTO에 맞설 수 있는 문화의 국제기구에 의해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짓는다.

장사꾼들에게 맡기기에는 문화가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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