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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신인문학상] 소설 당선작 '0시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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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1면

그리고...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낯선 방, 불안한 문고리, 짧은 커튼, 궁시렁거리는 주인 내외, 마지막으로 그녀까지.

내 몸만 민박집의 침대에 반쯤 누운 채 낡은 액자와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며 꿈을, 기억을 되돌리고 되돌리길 계속한다. 바다는 코발트블루이거나 군청, 아니면 진북청색이다.

극단적으로 기억에서 도피하려는 행위는 도리어 기억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바다로 보낸다. 방파제의 낚시꾼들은 하나둘 짐을 꾸리고 있다.

허공의 겨울 나비들도 자취를 감췄다. 내 기억 속에서 마지막으로 달아나려는 꿈의 파편들을 포획하려고 나는 서둘러 주인 아들의 책을 가져와 낚시꾼이 바다로 낚시바늘을 던지는 모습이 그려진 쪽의 여백에다 나비의 표본을 만들 듯 낱말 하나하나에 핀을 꽂는다.

낯선 내 방. 불안한 문고리. 짧은 커튼. 궁시렁거리는 주인 내외. 내 소설. 그녀...

이름은 겨우 남았지만 형상이 사라진 그것들의 흔적을 찾으려고 나는 한 손에 낚시교본을 든 채 침대부터 시작해 게으르게 방을 살핀다.

바다는 어두워지고 있다. 침대보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다. 단지 내 땀냄새뿐. 파도 없는 포구로 횟집의 불빛들이 내려와 불결한 형태로 번들거린다.

출입문의 잠금장치는 빈틈이 없고 게다가 이중이다. 부수거나 해체하지 않는 한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돼 있다(물론 여주인에게는 여벌의 열쇠가 있지만).

커튼은 안과 밖을 서로 다른 천으로 붙여 만든 것이라서 빛이 여과돼 들어올 수 없을뿐더러 벽까지 가릴 정도로 널찍하다. 방파제의 낚시꾼들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몇 쌍의 연인들만 어두워지는 먼 바다를 바라본다.

민박집의 여주인과 꿈 속의 주인 내외는 어딘가가 닮았다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내 소설과 그녀. 나는 형광등을 켜고 벽에 기댄 채,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방을 오래 노려보다가 살금살금 걸음을 옮긴다.

냉장고에는 물병 하나와 남은 맥주가 귤색 불빛을 걸치고 있다. 문을 닫고 옆에 놓인 텔레비전을 켠다. 천천히 채널을 한 바퀴 돌렸지만 허사다. 모두 낯선 이들뿐이다. 옷장과 거울 속도 마찬가지다.

낚시교본을 제자리에 던져놓고 침대로 돌아오다 걸음을 멈춘다. 교도관의 눈빛을 닮은 여주인이 떠오른다. 방에 들어서면 여주인의 궁금증이 날 선 가위가 되어 접근하는, 노끈에 묶인 라면상자.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 한 대를 끝까지 피운 뒤 라면상자를 탁자에 올려놓는다.

라면상자는 나비 모양을 한 노끈에 묶여 있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상자를 노려본다. 이제 바다는 유채색을 버리고 무채색을 선택했다. 포구의 불빛은 바다에 스며들지 못하고 달걀 반숙 모양 엎질러져 있을 뿐이다.

전화는, 가끔, 조작한 것처럼 드라마틱하게 걸려온다.

나는 침대에 반쯤 몸을 누인 채 전화를 받는다. 노끈으로 만들어진 나비는 상자 위에서 내 손길을 기다린다.그녀는 내 전화번호를 기억에서 소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내 기분은... 결혼식장 근처에서 걸은 전화를 장례식장에서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그녀의 목소리는 무채색의 바다 저 밑바닥에서 겨우 올라오는 것 같다. 나는 침착해지려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어디 있어?... 그 방이야?"

"그래, 그 방이야."

거울 속 사내의 입 모양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처럼 나는 대답했다.

"... 그 방은 어때? 변했어?"

"아니, 그대로야."

"... 그렇구나... 바다는?"

"바다도."

바다는 포구의 불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는 영동 산간지방의 폭설을 전한다. 불빛 너머로 눈이 내리는지 알 수 없다. 먼 수평선에서 오징어잡이배의 불빛이 해독하기 어려운 어떤 신호처럼 띄엄띄엄 떠오르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도 함께 떠오른다.

"숭어 낚시하는 거 봤겠네..."

"그래. 낮에.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여."

"방에 불을 켜놓았구나. 불을 끄면 보일 거야."

"그럴까."

나는 손을 뻗어 형광등의 스위치를 내린다. 그녀의 말대로 바다는 유리창 너머에서 흑백의 명암만으로 펼쳐진다.

"계속 그 방에 있을 거야?"

"응."

"네가 잘되었으면 좋겠어."

"고마워."

"... 이제 끊을게."

"... 저기, 네 꿈을 꾸었어."

나는 기계음이 올라오는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침대에 누워 액자 속 항구의 야경을 관람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곳이다. 침대에 기대 오 분 정도 바다를 바라보다가 일어난다.

소파에 앉아 역시 오 분쯤 텔레비전을 시청하다 눈을 돌린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바닥에 떨어진 낚시교본을 펼쳐 부록으로 실린 '어탑(魚榻)하는 법'을 약 오 분쯤 읽다가 그만둔다. 형광등 스위치 곁에 기대 노끈으로 묶어놓은 상자에 시선을 올려놓았다가 불을 켠다.

불빛이 촉촉하게 배어 있는 방은 어두운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나룻배 같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그녀가 회수해간 꿈을 기억해 내려다 그만둔다. 바다는 계속해서 짙어지는 무채색이다.

오롯하게 살아난 수평선의 불빛만 먼 거리를 달려와 두근거림을 진정시킨다. 저녁을 가지고 오겠다는 여주인의 전화를 거절과 함께 끊는다.여주인은 재차 전화를 걸어 이미 상을 차렸다고 통고하지만 나는 정말로 밥 생각이 없다고 설명한다.

나는 침대에서 냉장고로 기어간다. 그녀가 이 방을 찾아올 확률은 폭락하기 시작한 주가와 같다. 바다는 파도를 모조리 삼켜버린 듯 잔잔하다.

그렇지만 맥주 한 잔으론 내 마음의 파도는 진정되지 않는다. 바다는 고요한데 내가 탄 나룻배만 요동을 치는 것 같다. 나는 상자를 묶은 노끈을 풀고 그 안을 들여다본다.

아이들의 소꿉장난 도구 같은 물건들이 서로 어깨를 기댄 채 들어 있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나는 멀미하듯 키득키득 웃음을 게워놓는다. 색상이 다른 몇 장의 팬티와 검은 목도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팬티를 벗어 그 위에 놓는다.

스누피가 그려진 머그컵 두 개. 삼 분의 일도 쓰지 못한 스킨과 로션. 흰색 셔츠. 생일 선물로 받은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이란 소설책 상·하권. <미찌코 런던>이란 영문자가 쓰여 있는 검은 반팔티.함께, 홀로 찍은 꽤 많은 사진들. 육필로 쓴 편지들. 가요 테이프 몇 개. 그녀가 내 방에 흘리고 간 머리핀들,생리대, 목이 짧은 줄무늬 양말....

그리고 작은 포구의 민박집 이층에 홀로 있는 나. 나는 유리창 너머의 검은 바다를 보며 연신 키득거린다. 유리창에 비친 나도 검은 바다를 배경으로 키득거린다.

까옥! 내가 그녀에게 주었거나 흘린 것은 무엇일까. 바다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한 유리창 너머의 바다를 보며 맥주를 마시다가 나는 머그컵 속에 들어 있는 필름 한 통을 발견한다. 아직 현상하지 못한 필름이 안쓰러워서 나는 키득키득 웃는다. 하지만 필름 속에 어떤 장면이 들어 있는지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전화를 믿지 못한 여주인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선다. 쟁반 위에는 김이 솟는 만두국과 간장, 김치, 여벌의 열쇠 꾸러미가 있다. 탁자 위의 물건들을 훑어본 그녀는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술은 쉬었다가 마시고 이거나 좀 드셔."

나는 만두 몇 개를 우물거리다가 간신히 삼키곤 수저를 놓는다. 필름 속의 내용은 검은 바다처럼 여전히 캄캄하다. 그녀와 함께 찍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상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고 있다. 맞은편에 앉은 여주인은 내가 내민 잔을 받는다.

그녀의 뒤편에서 검은 입을 벌린 바다는 침착하게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나는 그녀가 잔을 비우는 동안 상자에서 끄집어낸 물건들을 상자로 돌려보낸다. 필름 한 통만 빼고.

"이 방에 들어와서 몸이 꽤 축났구만."

"아드님은 서울에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낚시질이나 하고 있겠지, 뭘 하겠어! 그나저나 일요일까지 묵겠다고 했던가?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음 갑갑하지도 않으우?"

나는 한 손에 필름을 쥔 채 고개를 끄덕인다. 여주인은 소파에서 일어나 열쇠 꾸러미를 쩔렁쩔렁 흔들며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내 아들 놈이 남긴 물건이랑 비슷비슷 하구만! 불알 달린 놈들이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내려가서 비디오 틀어줄 테니 그거나 보시우. 술 그만 마시고."

남은 만두국과 반찬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린다. 변기는 살찐 돼지가 돼버린 듯 꿀꿀거리다가 이내 다시 입을 벌린다. 나는 거품이 많은 노란 오줌 줄기를 그 입에다 넣어준다.

침대를 깨끗하게 정돈하고 그 위에 반듯하게 누워 지난 삼 년 동안의 여행지를 찾는다. 현상하지 못한 필름은 그 중 어느 곳이 고향일 것이다.

나는 필름의 검은 감광막 속에 갇힌 채 돌돌 말려 있을 기억의 작은 덩어리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한 여자와 삼 년 동안 연애란 것을 하면 그렇고 그런 여행지와 특별하거나 특별하지 않은 사연들이 낚시바늘에 걸려 줄줄이 올라오는 풍어기의 숭어처럼 흔한 풍경으로 자리하는 법이다.

나는 오래된 불발탄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만들었다가 이어 유효기간이 지난 통조림을 놓고 개봉을 걱정하는 심정으로 옮겨간다. 그 장소를 방문했다는 사실과 그 기분을 축하하기 위한 일련의 자세가 스물몇 장의 잠상으로 들어 있을 필름 한 통.

놓아줄 바다도 없고 요리를 해 식탁에 올릴 어떤 재료도 없는 장소에서 비린내나는 숭어 한 마리를 들고 있는 난감한 기분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주인이 틀어준 포르노 영화가 흘러나온다.

대사를 외울 암기력이 떨어지는 배우들이 즐겨 출연하는 장르다. 그나마 몇 마디 되지 않는 대사마저 들리지 않게 볼륨을 영으로 고정시키고 필름은 텔레비전 위에 올려놓는다. 침대로 돌아오는 내 손엔 맥주와 주인 아들의 책이 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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