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큰 그림 없는 남북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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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15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2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7개항의 합의를 채택하고 마쳤다. 대부분의 회담이 그렇듯 회담결과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아직도 남북회담에서 '합의' 를 도출했다는 사실 자체를 성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 만큼 7개항 합의는 일단 상당한 성과로 볼 수 있다.

모호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우리측이 요구했던 군사당국자 회담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도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이산가족 상봉을 연내 두차례 더 실시한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이것으로 면회소 설치 등 이산가족 문제의 제도적 해결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반면 국군포로나 납북자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못했고, 회담과정에서 북측에 일방적으로 끌려만 다녔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된 지도 벌써 세달이 흘렀고 장관급 회담도 두차례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남북관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림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과연 우리정부가 생각하는 남북관계의 목적지는 어디인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전략은 무엇이며 대북협상의 우선순위는 어떠한지에 대한 정부의 명확한 설명이 아직 없다.

또 남북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인지에 대한 차분한 분석도 찾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각종 이벤트가 경쟁적으로 추진되고 남북관계는 질풍노도처럼 어디론가 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 남북기본합의서의 추진 당시와 대조를 이룬다. 비록 이행되지는 못했지만 기본합의서를 보면 남북한이 대체로 무엇을 어떻게 해서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6.15 공동선언은 목적부터 분명치 않다. 공동선언을 통해 남북이 우선 추구하는 것이 통일인지 아니면 평화인지 모호하다.

정상회담 이후 북측은 남북관계의 모든 움직임을 통일과 관련시켜 해석하고 선전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대내용인지 아니면 연방제 통일실현을 위한 치밀하게 계산된 전략의 일환인지 알 수 없다.

반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정상회담 이후에도 여전히 통일은 20~30년 후에나 가능한 일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공동선언의 목표에 대한 양측의 해석에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이런 문제는 제기되지 않고 있다.

남북경협에 대해서도 경협의 목적과 원칙은 무엇이며, 재원은 어떻게 조달할 것이며 추진전략은 무엇인지 등 핵심사항에 대해 아직 정부차원에서 포괄적인 청사진을 제시한 적이 없다.

그런 가운데 비료지원, 식량차관, 개성특구, 경의선 복원, 경제시찰단 방문 등이 어지럽게 터져나오고 있다. 국민들이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모호한 상황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은 대북정책 추진이 투명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모든 것을 공개리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주요 결정이 어딘가에서 내려지고 장관급 회담은 이러한 결정에 모양새를 갖추는 듯한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투명성의 결여는 신뢰의 문제를 제기하고 신뢰가 흔들리면 정책추진이 어려워진다.

과거 남북관계에 예측가능성이 결여됐던 것은 주로 북한의 의도를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북한뿐 아니라 우리 정부의 의도도 무엇인지 분명치 않은 경우가 있다.

방향이 올바르다면 당장의 회담내용이 다소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향점이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남북관계가 이벤트에 밀려 흘러가서는 안된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최근 장관급 회담은 3차부터 본격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본격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3차 회담부터 북한이 통일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 올 가능성이 있다.

金위원장의 서울답방은 연방제 통일에 관한 합의와 직결된 문제인지도 모른다. 이제 정부는 통일문제를 비롯, 남북관계를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끌고 나가겠다는 구상을 국민에게 소상히 밝힐 때가 됐다.

그래야만 남북관계가 대다수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판단하고 국민이 안심할 수 있다.

백진현 <서울대 교수.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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