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말로만 '정보통신 선진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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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달 30일 오후 3시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은 신규 단말기의 대리점 공급 중단 조치를 발표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단말기 제조업체가 이 사실을 통보받은 것은 불과 하루 전인 29일. 단말기 보조금 폐지(지난 6월)로 매출액이 절반 이하로 곤두박질한 단말기 제조업체나 대리점에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몇달 전부터 부품을 발주해 만든 셀룰러폰은 이제 고스란히 창고 속에 들어가야 할 판이다.

소비자의 선택도 제한된다. 휴대폰을 잃어버린 011, 017 가입자는 앞으로 중고단말기를 구입해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016, 018, 019 같은 PCS로 방향을 바꾸든지...

SK텔레콤은 "017과의 기업결합에 따라 시장점유율을 50% 이하로 낮추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이라고 밝혔다. 인위적으로 시장점유율을 낮추라는 공정거래위원회의 판정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부가 시장에서 독과점적 위치를 차지할 게 뻔한 SK의 신세기통신 인수를 허용한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조치였다. 한번 단추를 잘못 낀 정책이 덧나기 시작한 것이다.

SK의 이번 조치를 차세대 이동통신인 IMT-2000과 관련해 해석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정부와 통신장비업계가 SK에 동기식을 채택하도록 압박해 들어가자 SK가 반발 카드를 빼들었다는 것이다.

"업계 자율에 맡겨도 IMT-2000의 기술표준은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 이라던 정통부는 SK가 계속 비동기식을 고집하자 뒤늦게 우왕좌왕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앞으로 정보통신 분야를 강력한 성장엔진으로 만들어 나가겠다" 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러려면 통신사업자와 제조업체.정부가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 그만큼 섬세한 정책이 필요한 게 정보통신 분야다.

하지만 이동통신 업계와 정통부 사이에 불신의 골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IMT-2000 사업권을 둘러싼 통신사업자들의 헐뜯기는 민망할 정도다.

통신장비업체들의 운명을 좌우할 단말기 보조금 폐지나 신규 단말기 공급 중단 조치 등이 사전 예고 없이 하루 아침에 터져 나오는 상황이다.

당연히 정보통신 시장은 꼬여나갈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기술개발이나 투자보다 정부의 의중을 탐색하거나 경쟁기업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보통신 선진국을 지향하는 한국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이철호 정보과학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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