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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기획·탐사기사] <가작> 대학가 '취업 스터디' 열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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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 대학 구내 게시판을 가득 채운 각양각색의 취업 스터디 회원 모집 안내문.

A양(23.B대학)은 며칠 전 교내 유명 스터디 그룹의 면접장면을 생각하면 불쾌감이 가시질 않는다. 입사 시험장을 방불케 하는 면접관들의 고압적인 자세 때문이다. 근엄한 표정의 면접관들은 차례로 "토익 성적이 920인데 이게 최고 점수입니까" "왜 5분이나 늦게 온 거죠. 시간관념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진지하지 않은 겁니까"라고 다그치듯 물었다.

A양은 "무척 당황되고 불쾌했다"며 "함께 공부할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스터디의 취업률을 높여 명성에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을 고르는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대학가의 취업 스터디 새 풍속도' 전문

면접관으로 참여했던 같은 대학 C군(26)은 조금 다른 말을 했다. "스터디에 가입시킬 사람을 찾는 데 토익이나 학점 등 최소한의 조건을 내거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대학가가 '스터디 열병'을 앓고 있다. 철학이나 문학을 논하는 고전적 스터디 그룹이 아니라 취업을 준비하기 위한 '맞춤 스터디'열병이다. 높아가는 청년 실업률과 좁은 취업문으로 캠퍼스가 '변종 스터디'의 홍수로 넘쳐나고 있다.

◆ "상아탑은 옛말, 너도 나도 취업 스터디"=취업 스터디는 세분화.전문화되고 있다. 삼성직무적성검사(SSAT)스터디.영어 프리젠테이션 스터디 같은 식이다. 스터디의 모집 공고는 학점.연령은 물론 토익 900이상, 졸업생 우대, 1년이상 영어권 연수자같은 조건을 내걸고 있다. 심지어 CPA(공인회계사) 소지자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높은 취업률을 자랑하는 이른바 '명품 스터디'일수록 선발조건은 까다롭다.

숙명여대 장진영(22.가명)양은 대학 2년때부터 해온 대중문화 스터디를 끝내고 최근 새로운 취업 스터디에 가입했다. 그는 "전공이나 대학생으로서 알아야 할 교양을 공부하고 싶지만 그런 것에 집중하는 순간 취업에서 뒤처지게 된다"고 했다.

대학가의 스터디 열풍은 갈수록 기세를 더하고 있다. 서울시내 8개 대학 졸업 예정자 400여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 '취업 스터디를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약 70%인 280여명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앞으로 스터디에 계속 의존할 것이냐'는 항목에도 65%의 학생들이 스터디에 취업 준비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겠다고 응답했다.

◆ "다양한 학과,과연 필요한가"=외국학생들의 눈에 이런 풍속은 낯설게 비쳐진다.

외국어대에서 영어프리젠테이션 스터디의 튜터를 맡고 있는 매트 로시안(21.영국)은 "한국 학생들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자연스러운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것같다"며 "모든 학생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공부만 한다면 대학에 다양한 학과가 있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 긍정도 부정도 할수 없는 현실의 한계=A대 취업정보센터 이준형과장(37.가명)은 "학생들이 학원이나 사설 강습 같은 의존형 취업 준비에서 자발적인 노력으로 서로를 이용하는 스터디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터디의 다양화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취업 스터디가 범람하는 것은 한국 대학생들의 우울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라는 지적도 있다. 외국어대 불어과 류은영 교수는 "사회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자신을 가혹하게 현실화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충고했다.

석 원 한국외대 인도어과
이보미 한국외대 불어과

<acchaa02@hanmail.net>

<spring1102@hanmail.net>

[대학생 기획·탐사기사] <당선 소감> 취업난 우울한 풍경 알리고 싶어

▶ 이보미(왼쪽)·석원씨

작성에 앞서 소재 채택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역시 기사거리를 찾기란 수월한 듯하면서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취업이 대학생들의 제1 과제가 된 지금 학문탐구에 대한 열정과 상아탑의 상징이던 스터디 모임 또한 본래의 순수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기사를 취재한 우리 역시 취업이란 현실의 과제 앞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우리는 대학 내 스터디 모임의 현상을 통해 대한민국 대학의 우울한 단상을 알리고자 했다. 대학가의 이런 세태는 대학 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서다.

스터디의 취재를 허락한 몇몇 모임과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준 외국인 학생들,도움말씀을 주신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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