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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몸싸움과 점거 농성만은 보지 않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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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아마 지난해의 세계적 경제위기를 우리가 다른 선진 국가들에 비해 잘 넘긴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니라면 연말에 있었던 아랍에미리트에서의 원전(原電) 수주와 해를 끌어온 용산 참사의 극적인 해결 탓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한 해 어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왠지 새해에는 모든 일이 잘될 것 같다는 희망과 기대감이 가족과의 대화 속에서 느껴졌다.

실제로 올해에는 G20이라는 커다란 국제행사가 예정되어 있고 정부는 5% 경제 성장을 약속했다. 피겨의 김연아 선수와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의 선전도 기대할 만한 일이다. 대통령은 국격(國格)의 제고, ‘더 큰 대한민국’을 강조했다. 쉽지 않은 목표들이지만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만큼 이런 정도의 기대감은 마땅히 가질 만한 것이다.

가족과 부푼 새해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을 무렵 국회에서는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새해 예산안과 노동법 개정을 둘러싸고 시한에 쫓긴 여야는 또다시 의장석 앞으로 몰려나와 서로의 멱살을 잡고 힘으로 밀어내는 추태를 보였다. ‘저렇게 안 싸우면 안 되는 거야’라고 딸아이는 물었고 아내는 ‘정치만 잘되면 세상이 다 잘될 것 같다’고 거들었다. 정치 뉴스가 궁금했던 나는 그 장면이 나오면서 TV 채널 선택권을 아예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희망 속에 새해를 맞이한 일반 시민들과는 달리 국회의원들은 의사당 안에서 고성(高聲)과 몸싸움 속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지난 한 해에 대한 성찰과 반성, 새해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각오를 다질 시간도 없이 구태의연한 몸싸움과 함께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한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것 같은 희망에 부풀어 있는 새해 초이지만 국민들이 유독 정치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기대감도 갖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치의 본질이 상이한 이해관계와 갈등의 조정인 만큼 정파 간 의견의 차이나 대립이 생겨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갈등 해소의 방법과 절차다. 비의회적이고 물리적 투쟁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겠다는 태도가 정치를 망치고 있다. 민주당은 4대 강 예산 삭감을 주장하며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고 그로 인해 4대 강 관련 일부 예산이 축소되었지만 정작 내년 예산 총액은 정부에서 제안한 금액보다 오히려 1조원이 늘어났다. 점거 농성과 몸싸움을 벌이는 소동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예산안과 관련해서 얻은 성과는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한편, 한나라당은 예산안 통과로 고무된 분위기인 듯하다. 그러나 집권당임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고 자율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하는 데 급급해서 정국을 교착시키는 한계를 보였다. 더욱이 군사작전하듯이 예결위 회의장을 바꿔 여당 단독으로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은 법적 해석과 무관하게 날치기 처리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연말 국회의 모습이 더욱 암담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것이 지난해의 일로만 끝이 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세종시 문제에 대한 정부 수정안이 곧 발표될 예정이고 아프가니스탄 파병 동의안도 제출될 것이다. 이 모두 여야 간 첨예한 입장의 차이를 보였던 핵심 쟁점들이다. 나아가 한·미 FTA, 한-EU FTA 인준 등 쉽게 풀기 어려운 또 다른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때마다 여야 간 대립으로 정국이 교착되고 육탄 대결과 점거 농성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글로벌 스탠더드가 일상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곳은 이제는 정치권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 희망의 사자성구는 강구연월(康衢煙月)이다. 번화한 거리에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란다. 정치에서도 그런 은은함을 느껴볼 수 있을까. 은은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올해에는 최소한 몸싸움과 점거 농성이라도 보지 않고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