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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한번 죽어보니 제대로 사는 길을 알겠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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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상*상(喪*想)전에 출품된 권혁수의 ‘사적(私積)’. 일상적인 삶의 단편들이 퇴적층을 이루며 쌓여 가는 것과 피안의 감성을 쌀알들과 가루의 만남으로 상징화했다. [목인갤러리 제공]


“안녕하세요. 서기흔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사망했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섰는데 장례식장이다. 출품작가 중 한 명인 서기흔(57) 경원대 미대 학장은 스스로 부고를 내고 자신의 죽은 모습을 찍어 내걸었다.

“사후 생이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만 나의 주검을 내가 본다는 것만큼 신비로운 경험이 또 있을까요. 인간은 무엇으로 성숙하나, 싶었는데 임종 체험으로 생의 후반부를 새로 맞이하렵니다. 특히 집사람에게 잘 하겠습니다.”

엄숙하게 듣고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달 30일 오후 6시, 서울 견지동 목인갤러리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장례 지내는 이상한 작가 11명을 만났다.

‘상*상(喪*想)-죽음의 삶을 스스로 생각하며, 삶의 죽음을 더불어 상상하며’는 디자이너·화가·사진가 11명이 꾸민 가상의 장례 전시다. 정병규·서기흔·홍성택·송성재·정주하·권혁수·윤희수·김영철·박연주·오진경·손승현씨는 각기 죽음을 나름대로 푼 시각물을 설치했다.

지난달 30일 목인갤러리에서 열린 ‘상*상 ’전 개막식에서 현대무용가 김성용씨가 죽음을 맞고 보내는 행위예술을 펼쳤다. [사진작가 정주하 제공]

영정사진을 내놓은 사진가 정주하(53·백제예술대학 교수)씨는 “연구실에 늘 걸어놓고 있는데 이 앞에 설 때마다 허허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해골을 닮은 돌 그림을 내놓은 윤희수(50·공주대 교수)씨는 “죽음은 삶에서 살짝 건너가는 경계 너머 같아서 그저 또 다른 세상일 뿐 나쁘다는 생각이 안 든다”며 “죽음에 대한 많은 상상을 기쁘게 즐겼다”고 좋아했다. 다른 작가들도 ‘죽음을 마음 속에 안아 들고 보니 그렇게 무겁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았다’는 소감을 털어놨다. ‘돌아선다와 돌아간다’의 의미를 새삼 음미했다는 작가도 있었다.

2008년 말 첫 번째 전시를 이끌었던 권혁수(53)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는 “죽음을 맞고 보내는 한국인의 태도가 각 병원 장례식장 틀에 값싸게 갇혀있는 게 안타까워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삶과 죽음은 본디 하나인데도 별개인양 생각 저편에 밀쳐두고 있다가 정작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는 본능이나 관습에 묻혀버린다는 것이다. 주어진 삶을 받아들었을 때 이미 한 몸으로 우리에게 와있는 죽음을 제대로 모시고 대접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삶을 원한다면 죽음에 대비하라’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경구가 전시장 곳곳에서 울린다.

창립 멤버인 정병규(64) 한국디자인네트워크 회장은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이 시절에 자신을 정화하는 하나의 의식”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첫 전시에 참가했던 작가들이 ‘죽음 앞에 준비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느꼈다고 고마워했다는 것이다.

‘딩~, 딩~’ 징과 북 소리에 맞춰 현대무용가 김성용씨가 죽음을 성찰하는 몸짓을 펼쳐 보이자 전시장은 삶을 떠나 보내는 한 척의 배가 되어 두둥실 떠올랐다. 망자의 넋을 다독이는 구음이 손승현씨의 영상물과 함께 어우러지자 작가도, 관람객도 담담히 죽음을 들여다보았다. 전시는 6일까지. 올해 말에 세 번째 장례식이 열린다. 02-722-5055.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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