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 당했다던 형제 살아있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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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꿈에 그리던 혈육을 만날 수 있게 된 이산가족들은 기쁨과 회한이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이들은 반세기 이상 가슴에 담아 뒀던 아픈 사연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재일(76.서울 노원구 월계동)씨는 북에 두고 온 부인 김순실(76)씨와 아들 영선씨, 동생 재삼(69).재실(63)씨, 사촌동생 재홍(57)씨 등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고 했다.

한씨는 이들 중 네살 때 마지막으로 본 아들 영선이가 가장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씨는 인민군에 징집돼 낙동강 전선에서 자유의 몸이 된 이후 현재의 아내인 소복순(77)씨를 만나 1남1녀를 두고 있다.

소씨는 북의 아내에 대해 언급을 삼가는 한씨를 향해 "다 세월 탓, 세상 탓인데 그분(김순실)도, 나도 불쌍한 것 아니냐" 고 격려했다.

○…누나 윤신자(74)씨와 남동생 태산(65).금산(61).도산(54)씨의 생존을 확인한 윤대호(72.서울 관악구 봉천동)씨는 "기독교 집안이라 모두 숙청됐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렇게 살아 있다니…" 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윤씨는 그러나 부모님의 사망 소식에 "살아계실 거라는 믿음 때문에 제사도 모시지 않았다" 고 망연자실해 했다.

○…채성신(72.경기도 하남시 덕풍동)씨는 어머니와 남동생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 정열(62)씨만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살아 계시면 90세, 87세였을텐데…" 라며 눈물을 흘렸다.

채씨는 "10여년 동안 어머니 제사에 사용해온 제기(祭器)를 가져가 어머니 묘를 찾아가겠다" 면서 "여동생 가족들에게 남쪽 혈육들의 사진과 족보를 꼭 보여주겠다" 고 말했다.

○…부부가 함께 방북을 신청했으나 자신만 1차 명단에 포함된 개성 출신의 이윤용(81)씨는 아내 김옥성(77)씨의 두 동생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반가워하면서도 방북 대상에서 아내가 빠진데 대해 아쉬워했다.

이씨는 "처남.처제가 살아 있다니 감개무량하다" 면서도 "정작 아내가 가지 못하고 대신 가게 돼 아내에게 미안하다" 고 말했다.

○…박용화(83.제주시 연동)씨는 북에 세 아들과 여동생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가족들을 남겨두고 월남했었다는 회한에 눈물조차 마음껏 흘리지 못했다.

박씨는 "6.25때 피란온 고향(평안북도 연변)사람들로부터 가족들이 배급도 제대로 못받아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죄책감에 밤을 샌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며 "이제야 가슴에 쌓인 한을 조금이나마 풀게 됐다" 고 말했다.

○…일부 실향민들은 직계 가족이 월남했다는 사실이 남측 언론 보도를 통해 북한 당국에 알려져 북의 혈육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했다.

누이 대신 조카를 만나겠다고 방북을 신청했던 A씨는 "94년부터 중국을 통해 남한에 살고 있는 누이가 북의 조카와 편지를 교환해왔다" 고 말했다.

A씨는 또 "어머니가 남한에 있다는 이유로 조카가 해를 보게 될까봐 방북 신청도 삼촌인 내가 대신 했다" 고 말했다.

○…서울 중구 남산동 대한적십자사에는 이날 오후 내내 북쪽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전화와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적십자사측은 직원 7명을 배치했으나 수백통씩 걸려오는 확인전화를 일일이 응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사회부.전국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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