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과학벨트, 서울서도 지방서도 접근 쉬워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7호 14면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행정부의 ‘왕차관’으로 불리는 박영준 총리실 국무차장은 지난해 11월 말 미국 시카고의 페르미 국립 가속기연구소(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Fermilab)를 찾았다. 후진국을 지원하는 공적개발원조(ODA)의 국제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워싱턴 등을 방문하고 난 다음 연구소를 둘러본 것이다.

美 페르미 연구소 부소장 김영기 박사

이곳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입자물리학 연구소다. 1977년 자동차 사고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한국인 천재과학자 고 이휘소 박사가 이론물리학 연구부장으로 일했던 곳이다. 박 차장이 그곳을 찾은 건 초대형 양성자 가속기인 테버트론(Tevatron) 등의 시설과 장치를 살펴보고, 한국과의 협력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정부가 과학비즈니스 벨트 건설 차원에서 세종시에 설립하려고 하는 기초과학연구소와 교류하는 문제 등을 검토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21세기 이끌 세계 과학자 20인에 뽑혀
박 차장 일행을 안내한 사람은 이 연구소 부소장인 김영기(48·시카고대 물리학과 교수·사진) 박사.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성과를 내고 있는 김 박사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 가능성이 있는 과학자로 꼽힌다. 김 박사는 2000년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Discovery)’가 선정한 ‘21세기의 세계 과학을 이끌 과학자 20인’에 포함됐다. 2004년엔 미국 물리학회(American Physical Society·APS)의 최고 영예인 APS 펠로로 선정됐다. 홍승우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는 “한국 국적의 과학자가 페르미 연구소 부소장을 맡고 있다는 건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라며 “김 박사가 그런 위치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그의 연구 업적과 리더십이 탁월하다는 걸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김 박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과학 수준을 선진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끌어올리려면 과학 클러스터(cluster), 즉 각종 기초·응용과학 연구소들이 몰려 있는 단지를 만들어야 한다”며 “한국 정부가 과학비즈니스 벨트를 건설하려고 하는 건 잘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에는 현재 없는 중이온 가속기를 과학비즈니스 벨트에 설치하면 기초과학과 첨단과학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중이온 가속기가 있으면 핵 원소와 희귀 원소의 생성 등을 알 수 있고, 암도 치료할 수 있는 등 그 연구와 응용 범위가 매우 넓다”는 얘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95년 소립자 톱쿼크 발견 업적
-연구 업적을 소개해 달라.
“물질 세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건 소립자라는 것이다. 그것보다 작은 게 없다. 핵이 작다고 하지만 소립자는 아니다. 쿼크(quark)나 전자가 소립자다. 쿼크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무거운 게 톱쿼크(top quark)다. 그걸 1995년 내 연구팀이 발견했다. 페르미 연구소는 톱쿼크보다 가벼운 바텀 쿼크(bottom quark), 세 가지 중성미자(neutrino) 가운데 타우 중성미자라는 것도 발견했다.

자연의 힘에는 네 가지가 있다. 중력(gravity), 핵력(강력·strong interaction force), 약력(weak interaction force·원자핵이 분해될 때 전자와 중성미자를 만드는 상호작용으로, 아주 약한 힘으로 서로 밀거나 끌어당기는 힘), 전자기력(electromagnetic force)이다. 나는 지난 20여 년간 약력을 매개하는 W입자, 그리고 톱쿼크를 연구해 왔다.”

-40대의 나이에 연구소 부소장이 된 비결은.
“1990년 UC버클리에서 연구하고 있을 때 페르미 연구소의 ‘양성자·반양성자 충돌실험 그룹(Collider Detector at Fermilab·CDF)에 가담했다. 이후 CDF의 소그룹 팀장을 맡아 실험하면서 톱쿼크를 발견했다. 2004년엔 임기 2년의 CDF 대표로 선출됐다. 800여 명의 과학자가 투표했는데 내가 당선됐다. CDF 대표 임기를 마칠 무렵인 2006년 부소장(임기 5년)으로 승진했다. 연구도 연구지만 맡은 조직을 나름대로 잘 이끌었던 게 평가를 받은 모양이다. 나는 중복업무(multi-tasking) 수행에 능한 편이다. 조직관리나 행정도 연구만큼 중요한데 행정업무도 잘하려고 노력했다. (중력을 발견한) 뉴턴이 있었을 때는 혼자 과학을 하는 시대였지만 여러 분야에서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한 요즘엔 과학자끼리 협력(collaboration)을 잘해야 한다. 고려대에 다녔을 때 탈춤반 활동을 했는데 그때 남들과 협력하는 능력이 알게 모르게 개발된 것 같다.”

-세종시를 행정중심복합 도시가 아닌 과학비즈니스 도시로 만들겠다는 한국 정부의 방침을 어떻게 생각하나.
“다수 행정기관의 이전이 옳고, 그른지 깊이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하기 어렵다. 강조하고 싶은 건 과학 벨트 건설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과학 벨트를 건설하려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입지를 정해야 한다. 서울과 지방 어느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에 과학 벨트를 세우면 좋겠다.”

-한국 정부는 세종시에 중이온 가속기를 설치하겠다고 한다. 가속기란 무엇이며, 그걸 설치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가.
“가속기란 아주 성능이 좋은 배터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에 전하(電荷)를 띤 입자를 넣으면 움직이고, 속도가 빨라진다. 페르미 연구소 가속기는 양성자와 반양성자를 반대 방향으로 가속시켜 충돌시킨다. 가속기를 쓰면 지금 지구상에는 없는 반입자(antiparticle)를 만들 수 있다. 우주가 진화하면서 반입자는 없어지고, 입자만 남은 만큼 가속기를 이용하면 반입자가 어떻게 없어졌는지, 우주 초기는 어떤 상태였는지 연구할 수 있다. 가속기는 또 재료공학·생명공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이휘소 박사 펠로십 만들어
-한국에선 우수한 인재가 기초과학을 기피하고 의대로 몰리고 있다.
“순수 자연과학도 필요하고, 공대·의대도 필요하다. 중요한 건 균형이다. 정부가 과학의 균형을 맞추는 정책을 펴야 한다.”

-한국에서 과학분야 노벨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 사람은 성과를 빨리 내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기초과학 분야에서 연구 성과가 나오려면 10년, 수십 년이 걸린다. 순수과학에서 업적을 내려면 참을성 있게, 진득하게 연구하는 게 필요하다. 권투선수가 챔피언이 되려면 오랜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런 챔피언 정신(champion spirit)이 필요하다. 또 기초과학을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도록 대형 실험장치를 보유한 연구소들을 많이 건립해야 한다. 그리고 그걸 개방해야 한다. 페르미 연구소는 초·중·고교생과 대학생에게 과학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휘소 박사와 간접적인 인연이라도 맺은 게 있나.
“고려대 재학 시절 스승이었던 강주상 명예교수가 이 박사의 제자였으므로 사손(師孫)이 되는 셈이다. 강 교수의 명강의 덕분에 나는 물리학에 재미를 붙였다. 내가 연구소 부소장이 되자마자 이 박사의 이름을 딴 ‘벤 리(Ben Lee) 펠로십’을 만든 건 이론하는 사람과 실험하는 사람 사이의 소통을 강조했던 이 박사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뜻에서였다.”

-꿈은 무엇인가.
“자연의 법칙을 더 많이 이해하는 것이다. 소립자에 질량을 주는 힉스입자라는 게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그런 걸 규명하고 싶다.”
김 박사는 고려대 물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로체스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UC버클리에서 학생을 가르치다 2003년부터 시카고대로 옮겼다. 이 대학 교수와 페르미 연구소 부소장을 겸직하고 있다. 남편 시드니 네이글(Sidney Nagel)은 시카고대에서 고체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