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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이 뚝 끊기자 펼쳐진 하늘, 삶도 그러하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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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호 16면

성 마리아 성당의 유적 옆 공동묘지에서 바라본 스톤헤이븐의 코스와 클럽하우스. 깎아지른 절벽과 묘지, 전쟁의 상처에 둘러싸인 스톤헤이븐 코스는 골퍼들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해안도로를 따라 애버딘에서 던디로 내려가던 중 창 밖으로 그림 같은 풍광이 나타났다. 제주 섭지코지처럼 깎아지른 절벽 위 비탈진 벌판에 눈부시게 푸른 초원이 펼쳐졌다. 야수파의 대가 앙리 마티스도 표현하지 못할 초록과 파랑의 강렬한 대비였다. ‘이런 곳에 골프장을 만들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깃발이 보였다. 골프장이었다. 차를 돌렸다.

성호준 기자의 스코틀랜드&웨일스 투어 에세이 ⑬ 스톤헤이븐

코스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는데 입구에 들어서자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림엽서 같은 멋진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18번 홀 그린 옆 공동묘지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서서히 비탈을 타고 내려가다 순식간에 낭떠러지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위태롭고도 허무한 코스의 존재 때문인 듯도 했다. 절벽은 부산 태종대의 자살바위가 연상됐다. 길게 뻗어나간 초원이 뚝 끊긴 순간, 그 종착지에서 다시 파란 창공이 나타나고, 또 바다는 시작됐다. 삶과 죽음의 모습이 이곳에 있었다. 일행 모두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 같다. 모두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코스를 바라봤다.

날카롭게 돌출된 곶 끝의 그린으로 골퍼들이 캐디백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사람들처럼 영적이었다. 캐디백을 내려놓고 바다와 닿은 그린에 오른 그들의 모습은 삶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천국의 골퍼로 보였다.

골프장 이름은 스톤헤이븐, 돌의 안식처라는 뜻이다. 흰 옷을 입은 꼬마들이 클럽하우스 앞 연습 그린에서 퍼팅 놀이를 하고 있었다. 스톤헤이븐은 1888년에 세워졌다. 경치가 워낙 아름다워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경치 좋은 코스’에 단골로 꼽힌다고 한다. 경사지라 코스 어디서나 아찔한 낭떠러지를 느낄 수 있다. 아담한 도시 스톤헤이븐의 스카이라인과 가끔씩 지나가는 기차는 코스의 감성을 풍부하게 했다. 120년도 넘은 코스라 이런저런 역사도 많다. 그러나 파66에 5103야드로 전장이 짧고 비탈에 세워져 명문코스는 아니다.

코스의 모양은 공구인 스패너의 헤드 같다. 1번 홀과 5번 홀 그린이 바다 쪽으로 돌출된 곶 끝에 있다. 이 뾰족한 땅끝을 향해 샷을 하는 골퍼들의 모습은 영원을 향해 샷을 하는 인상을 줬다. 라운드를 마치고 돌아오는 골퍼에게 물어보니 “바다 때문에 1번과 5번 홀 그린으로의 어프로치샷은 매우 떨린다”고 말했다. 석가모니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했다. 본질적으로 허점투성이인 골퍼들에게 저 찬란한 청색 물결은 벌타의 바다일 뿐이다.

2번 홀엔 ‘히틀러의 벙커’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을 폭격하고 돌아가던 독일 비행기가 이곳에 폭탄을 떨어뜨려 생겼다. 몬트로스와 포풋에도 폭탄의 상처가 벙커로 남았다.

18번 홀 그린 옆 묘지는 원래 성 마리아 성당이었다. 무너진 성당 건물 안에도 묘지들이 들어와 있다. 스코틀랜드에는 비석 하나에 한 사람이 아니라 한 가족 모두의 이름을 새기는 경우가 많다. 각 비석에 새겨진 가족사를 둘러보다 한 사연이 눈에 들어왔다. 어부였던 아버지는 여든을 넘겨 살았다. 그의 아내는 50대에 세상을 떴다. 아마도 2차대전 중 전사한 군인이었나 보다.

따져보니 어부는 40대에 아들을, 50대에 아내를 하늘로 보냈다. 고해(苦海)에 그물을 던져 얻은 물고기를 들고 가족도 없는 집으로 돌아갔을 그 어부의 인생은 어떠했을까. 혼자 살았던 생의 마지막 30년이 행복했을까, 가족과 함께 묻혀 있는 지금이 행복할까. 무덤의 십자가는 양지 바른 곳에 서서 고통의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골프 한 라운드를 고스톱 18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스톤헤이븐의 위태로운 절벽 위에선 뭔가 깨달음을 느낄 것이다.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 중엔 코스에 묻히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 오거스타 내셔널에서 1934년부터 76년까지 42년간 체어맨으로 군림했던 클리퍼드 로버츠는 코스 15번 홀의 호수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로버츠는 여전히 오거스타 회원들에게 절대적이다. 회원들이 클럽의 정책을 정할 때 “로버츠는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할 만큼. 그는 15번 홀 연못 속에서 오거스타의 영혼으로 아직도 살아 있다.

프로골퍼 데이브 마는 아버지가 살아생전 다녔던 골프장을 찾아 다니며 유골을 뿌렸다. 달에서 골프를 쳤던 우주 항공사 앨런 셰퍼드의 유골 일부는 페블비치에 묻혔다.

내가 골프의 스윙 대신 골퍼의 마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임스 도드슨이 쓴 『마지막 라운드』라는 책을 보고 나서다. 암에 걸려 2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아버지를 모시고 골프의 성지인 세인트 앤드루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 골프 기자의 얘기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통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아들에게 말했다. “인생이 우리에게 약속해 주는 것은 슬픔뿐이야.” 그러나 아버지는 그 슬픔 속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는 것, 실수로 가득한 골프 코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인생을 골프에 비유하지만 골프가 훨씬 더 응축돼 있다. 한 라운드에서 골퍼는 희망, 욕심, 집착, 좌절, 분노, 질투, 모멸감, 체념, 증오, 오만, 허풍, 위선, 환희, 유혹, 후회, 속죄, 카타르시스 등을 경험한다. 뜨거운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춘의 가슴처럼 골프장에서 한 사람의 존재는 격렬한 감정 속에 불타 없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이 탄생한다. 마라톤에서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러너스 하이’보다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스트셀러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인 심리학자 스콧 펙은 “골프는 육체적·정신적·영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는 연습”이라고 했다. 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과 해탈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책 마지막 라운드에서 부자는 올드 코스에서 골프를 치지 못한다. 추첨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올드 코스의 라운드는 그들 여행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아들은 다른 수를 써서라도 골프를 할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아버지는 ‘다른 방법’은 원하지 않았다. 골프의 정신을 지키고 싶어했다. 결국 그들은 땅거미가 지는 올드코스 페어웨이를 걸으며 상상의 샷을 날리는 것으로 여정을 마감한다.

인생의 끝이 임박해서 스코틀랜드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를 바라는 골퍼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순간이 된다면 마지막 라운드는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가 아니라 스톤헤이븐에서 하고 싶다. 성 마리아 성당 묘지 옆에 있는 18번 홀 그린에 서면 인생을 고통의 바다로 만들었던 수많은 욕망과 집착을 편안하게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스톤헤이븐은 골퍼들의 안식처다. 장점이 하나 더 있다. 스톤헤이븐은 올드 코스와 달리 부킹 가능성이 100%다.



취재협조 영국 관광청, 스코틀랜드 관광청,
웨일스 관광청 www.visitbrit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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