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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으로 간 6·25 중공군 포로 1만4715명 그 후 … 국내 언론 첫 현지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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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타이베이현 룽자의 런페이주(任佩珠) 보호관이 중공군 참전 용사들이 타이베이에 도착한 날 찍은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총통부 앞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참석한 용사들이 꽃다발을 든 채 군중에게 팔을 들어 보이는 장면이다.

6·25의 포성이 터진 뒤 한 갑자(甲子)가 지났다. 이젠 기억마저 흐릿하다. 그러나 아픔만은 생생하다. 잊어서는 안 될, 잊을 수 없는 고통은 재생산된다. 당시 상처를 가슴에 품은 채 아직도 신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비극만 되뇔 수는 없다. 상처를 넘어 생명과 평화를 만들어야 할 때다. 그 가능성을 인물과 현장에서 찾았다. 하나는 6·25 참전해 포로가 된 뒤 대만행을 택한 ‘중공(中共)군 노(老)전사들’의 행복이다. 이들의 주름진 웃음살에 평화가 배어 있다. 이들은 단호하게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고 외친다. 또 하나는 군사분계선(DMZ)의 변신이다. 살육과 대립의 현장에 생명과 평화가 이식되고 있다. 지뢰밭에 생태공원이 만들어지고, DMZ 탐방로에선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 모습들을 만나 본다.

“마오쯔(帽子)! 마오쯔!”

올해로 101세를 맞은 쿵롄파(孔連法)옹이 간호사한테 손짓한다. 털모자를 가져왔다. 쿵 노인은 이 모자를 쓰고서야 사진기 앞에 섰다. 쿵옹과 동갑인 장런위안(張仁元)옹 역시 납작모자를 쓴 뒤에야 촬영을 허락한다. 보슬비 내리는 건물 밖. 러우한룽(婁漢榮)옹도 올해로 100세를 넘겼다. 몸이 불편해 전용 병원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 온 기자다. 사진 한 장 찍겠다”고 하자 웃으면서 손을 올려 포즈를 취한다. 말을 하려 했지만 기력이 없는 듯 포기한다.

이번엔 식당이다. 여든이 넘는 노인 100여 분이 줄지어 서서 반찬과 국을 탄다. 주식은 밥과 만두·죽 세 가지다. 어린애처럼 들뜬 표정들이다.

대만 타이베이(臺北)시 남부 타이베이현의 싼샤(三峽)진에 있는 충의산장(忠義山莊)의 풍경이다. 대만 전역의 48개 룽자(榮家) 가운데 한 곳이다. 룽자는 ‘룽민(榮民), 즉 영예국민이 사는 집’이다. 갈 곳 없는 퇴역 군인들을 평생 돌보는 곳이다.

충의산장 거주자는 일반 룽자가 아니다. 6·25전쟁에 참전했다 포로가 되어 대만으로 온 용사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참전용사는 285명이다. 평균 연령은 82.6세, 100세를 넘긴 분만 넷이다.

대만에는 ‘123 자유일’이란 기념일이 있다. 6·25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1월 23일 포로수용소에 억류됐던 중공군 병사들이 대만에 도착한 날이다. 총 1만4715명이다. 대만 정부는 그해 10월 31일을 ‘제1회 영예국민절(榮民節)’로 선포했다. 퇴역군인을 관리하는 행정원 산하 퇴역군인 관리위원회 장창린(張長林) 과장은 “룽민 관리 비용으로 한 해 약 300억 신타이비(新臺幣-약 1조2000억원)의 예산이 사용된다”고 전했다.

이 가운데 정신이 비교적 맑은 용사 다섯 분을 만났다. 핑잔팡(平占芳·77), 쉰수더(荀樹德·80), 진위안퀴(金元奎·81), 장리취안(張立全·83), 왕수위안(王樹袁·80)옹이다.

-어떻게 6·25 전쟁에 참전하게 됐나.

왕:50년 7월 항미원조라는 신성한 의무에 동참해야 한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51년 1월 전투에 투입됐다가 6월에 포로가 됐다.

핑:나는 국민당 소속 국군이었다. 서북군인 옌시(延西) 3부대였다. 48년 산시(山西) 장라이전(張來鎭)에서 홍군(국공 내전 당시의 중공군)에 붙잡혔다. 포로가 된 후 허베이 지역으로 이동해 1개월 동안 교육을 받았다. 곧 이어 항미원조 전쟁에 참가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장:4형제의 막내였다. 고향은 허베이성 스자좡(石家莊) 인근의 시골이다. 어느 날 해방군(중국 건국뒤의 중공군)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항미원조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며 나를 차출했다.

쉰:서북군 옌시 3부대 소속의 국군이었다. 주둔지는 산시(山西)성 타이위안(太原)이다. 홍군은 49년 초 타이위안 지역에 대한 대공세를 펼쳤다. 이 교전에서 붙잡혔다. 19세였다. 현지에서 1개월간 홍군 편입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8병단에 배속됐다.

진:난 저장(浙江) 샤오싱(紹興)에서 양 치는 목동이었다. 그러다 속아서 군대에 끌려왔다. 해방군은 “미군이 조선을 침범했다”고 말했다. 49년 입대해 51년 4월 세 번째 투입군으로 동북으로 이동했다. 압록강을 건널 때야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전투 상황을 전해 달라.

핑:전투를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리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 비행기는 무서웠다. 밤에만 이동했다. 볶음면 가루를 물에 타서 마셨다. 낮에는 웅크린 채 하루 종일 잠을 잤다.

진:속아서 온 전쟁이지만 도망갈 데가 없었다. 앞 부대가 전멸하면 뒷부대가 투입됐다. 그 부대가 전멸하면 또 다른 부대가 투입됐다. 정렬이나 정리가 있을 리 없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나중에는 생존자끼리 아무렇게나 모여 부대를 결성했다.

-수용소 생활은 어땠나.

핑:비참했다. 하루 세 끼, 한 끼에 만두 하나만 제공됐다. 아사만 면할 수 있는 정도였다.

진:포로가 됐을 때 행복했다. 굶주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사를 겨우 면할 정도의 허기가 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끝없이 부과되는 노동은 마지막 남은 기력마저 앗아갔다.

-왜 대만행을 선택했나.

왕:돌아가면 투항병으로 몰려 처벌받을까봐 두려웠다.

장:해방군에 차출된 뒤 내가 본 해방군은 가난했다. 사상적으로 지나치게 옥죄었다. 그래서 대만을 택했다. 한데 고향이 그리워졌다. 99년 대륙으로 갔다. 그러나 대륙은 차가웠다. ‘투항병’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투표권도 주지 않았다. 2009년 4월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다.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핑:전쟁은 모두의 죽음이다. 이걸 기억해야 한다. 123 자유일 55주년을 맞아 5년 전 제주도에 다녀왔다. 옛날과는 천국과 지옥 차이였다. 전쟁이 없었기에 가능했을 거다.

장:나도 5년 전 제주도를 찾았다. 수용소가 있던 옛날에 비해 몇 천 배나 좋아진 것 같았다. 자꾸 눈물이 나왔다. 제주가 다시는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빌었다.

쉰:난 5년 전 거제에 갔다. 과거에는 배를 타고 갔지만 그땐 차를 타고 들어갔다. 한국은 수용소 터에 과거를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전쟁을 기억하면 전쟁에 다시 말려들 염려는 없을 것이다.

글·사진 타이베이현=진세근 기자

◆그들은 누구=대만행을 선택한 중공군 포로들의 성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공(國共)내전 당시 국민당 소속 국군이었다가 홍군(紅軍)에 붙잡힌 뒤 인민지원군에 편성돼 한반도로 투입된 부류다. 중국에서 징집된 대륙 출신 가운데 상당수도 이런저런 이유로 대만을 택했다. 이들 가운데 9669명이 살아 있다. 이 가운데 325명은 다시 대륙행을 택했다. 대만 정부는 대륙으로 간 용사들에게 매월 2800위안(약 5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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