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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상금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임영태씨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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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임영태씨는 “사소한 한 장면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드러내는 강렬한 순간을 소설에서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이 수십 번 퇴고를 반복하는 엄격한 글쓰기로 이어졌을 것이다. [최승식 기자]

임영태씨는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동갑내기 소설가 구효서·박상우보다 5, 6년 늦은 출발이었다. 94년 장편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로 민음사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작가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임씨의 소설은 초판 3000부 팔리기 바빴다. 소설 팔아서는 생활이 안 됐다. 급기야 임씨는 4년 전 대필 일을 시작했다. 돈을 받고 의뢰인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 주는 유령작가가 된 것이다.

수상작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에는 임씨의 뒤틀린 내면이 투영돼 있다. 소설이라고는 써본 적이 없는 대필작가 ‘나’는 남의 얘기가 아닌 자신의 얘기를 쓰기를 꿈꾼다.

수상작은 마흔한 살의 대필작가가 겪는 크고 작은 대필 에피소드, 죽은 이들과 교감하는 판타지 설정 등을 통해 극진한 아내 사랑, 반려 동물과 진한 교감 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따뜻한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살면서 어쩔 수없이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죽은 이의 유령을 보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하지만 지속적인 내면의 각성을 통해 세상과 이웃,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일종의 치유, 혹은 성장소설이다. 무엇보다 빠르게 읽힌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소설 속에서 대필 수요는 줄기차다. 종합병원 부원장, 법무법인 대표, 유복한 할머니, 재기를 노리는 사업가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대필작가에게 부탁해 자기 나름의 사연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한다. 집단적이라 할 만큼 우리사회 구성원의 심층은 ‘발언욕구’로 들끓고 있다. 수상작의 세태소설 측면이다.

심사위원들은 수상작에 대한 애정과 지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가독성 뛰어난 발 빠른 서사가 돋보이는 명징한 세태소설, 애잔한 풍속소설이다”(소설가 김원우), “진부한 일상의 곳곳에서 감동의 그림자를 만나게 되는 것은 소재를 다루는 작가의 솜씨가 그만큼 충실하고 세련되기 때문이다.”(번역가 김석희)

지난해 12월 28일 임씨를 만났다. 3주 전 당선 사실을 알렸을 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던 임씨는 평상심을 회복했다. 소탈하게 소감과 포부를 밝혔다.

-주인공의 직업, 기르던 개 ‘태인’의 사고 등 소설 상당 부분이 실제 경험이다. 어느 정도까지 자전적인가.

“몇 가지 사실이 일치한다고 해서 과연 몇 %나 자전적 작품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작가인 나의 가치관과 시선이 사실을 변경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이제까지 내가 쓴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평생 한 주제, 한 캐릭터를 그려온 것 같다. 콜린 윌슨이 명저 『아웃사이더』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주로 뻔뻔한 경쟁사회를 등지고 스스로 삶의 외곽을 선택한 사람, 그래서 정서적으로 쓸쓸한 사람을 그려 왔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다. 펑펑 울면서 길 가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절로 돌아보게 되지 않나. 우는 사람 같은 게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내 책을 읽고 독자들이 스스로를 돌아봤으면 한다.”

-기성작가이면서도 대필을 했고 이번에는 소설 공모에 응했다. 자괴감 같은 건 없었나.

“가져야 하나. 그런 거 없다. 나 말고도 한국 작가들, 소설만 써서 먹고 사는 사람 드물다. 대필을 시작했을 때 소설을 써서 생활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을 뿐이다. 물론 동료나 후배 작가들이 내 작품을 심사한다는 점이 꺼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보다 많은 독자와 만나고 싶었다.”

-속도감 있게 읽힌다. 비결이 있다면.

“글쓰기에 더 엄격해졌달까. 2007년 출간한 역사소설 『호생관 최북』부터 생긴 변화다. 과거 탈고 시 80%쯤인 작품 완성도를 퇴고하면서 100%까지 끌어올렸다면 지금은 탈고 때 완성도를 20%로 잡고 있다. 퇴고에 80%를 쏟아 붓는다. 이번 작품은 6개월 만에 탈고하고 1년 반 동안 전면적 개작을 20번쯤 하며 퇴고했다. 그러다 보니 한 300번은 읽은 것 같다.”

-아내가 남긴 문패의 문구이면서 소설 제목인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의 의미가 궁금하다.

“말하지 않겠다. 독자 나름대로 느끼실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제목은 읽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어쨌든 주인공이 겪게 되는 심경변화와 관련 있는 것 같다. 나름의 해답을 찾아보시라.

신준봉 기자

줄거리

마흔한 살인 나는 의뢰를 받아 글을 써주는 대필작가다. 생계를 위해 우연찮게 시작한 일이 4년 넘게 본업이 됐다. 서울 동교동의 반지하 연립주택이 ‘제3의 작가’ 대필 사무실이자 나의 주거공간이다.

내게는 살면서 얻은 크고 작은 상처가 있다. 무능력했던 아버지, 왕따였던 공장 동료,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이웃집 누이 등. 이 모든 이들에게 냉담했던 게 부채의식으로 남아 있다.

특히 시골에 살 때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잃은 진돗개 태인이, 1년 여 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학벌·인맥 사회를 원망만 할 뿐 사회 부적응자였던 나를 아내는 언제고 감싸줬지만 나는 한 번도 아내에게 감사와 사랑의 표시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

1년 전부터 나는 유령이 보인다. 자신의 얘기를 내 이름으로 소설 출간하라며 계약금 수백 만원을 내놓고는 비명 횡사한 60대 초반의 장자익씨도 유령으로 나를 찾아온다. 장씨의 유령을 만나며 내 상처는 서서히 치유된다. 진돗개 태인이와 화해하고 죽은 아내의 사랑을 지금 느낀다. 아내가 남긴 문패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의 뜻도 어렴풋이 이해될 것 같다.

심사평
대필 작가의 몽환적 일상, 도시 거리의 세밀한 풍경 … 진지한 소통에 박수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에 투고된 작품 중에서 수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작품은 문학성과 대중성을 아우르는 작품을 뽑는다는 취지에 걸맞은 소설적 기획을 골고루 보여주었다. 장르문학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작품부터 역사 소재의 가공, 성과 사랑에 관한 다양한 보고서, 소박하고 따뜻한 성장담까지 다양한 성향의 작품이 후보작으로 선정됐다. 현재 한국소설의 현장에서 진지하고 활발한 서사적 실험과 모색이 이뤄지고 있다는 징표다.

지난해 12월 4일 본사 회의실에서 있었던 중앙장편문학상 본심 장면. 왼쪽부터 백지연·이순원·김석희·공지영·김윤식·김원우·정이현·김동식씨. 김성룡 기자

심사위원들은 예심에서 올린 후보작을 검토한 후 1차 투표로 『돼지』와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을 논의대상으로 압축시켰으며, 상세한 토론을 거친 후 2차 투표에서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후보작 중 하나인 『돼지』는 돼지농장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한 가족의 삶을 그려낸 작품으로서 생생하고 실감나는 묘사와 개성적인 이미지의 창조로 시선을 끌었다. 해박하고 디테일한 묘사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소설 전반을 장악하는 강력한 비유적 장치는 그 자체로 소설을 읽는 흥미를 배가시켰지만 소설의 중심사건이나 인물과의 긴밀한 연계를 이루지 못하면서 주제의식을 약화시킨 아쉬움을 주었다.

임영태씨의 수상작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은 대필 작가의 일상을 중심으로 산 자와 죽은 자,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넘나드는 몽환적이고도 흥미로운 기억의 서사를 보여준다. 죽은 아내를 매개로 하여 주인공의 내면에 환기되는 기억은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과 소통의 욕구를 절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내를 잃은 주인공이 거리를 배회하면서 이따금씩 마주치는 유령은 환상 속의 인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우리가 지나쳤던 삶의 순간을 기억 속에서 끌어올리게 하는, 그 동안 함께 살고 있었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우리 안의 타자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주변의 타자와 소통을 모색하는 과정은 대필 행위로부터 출발한 글쓰기가 자기의 성찰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로 전환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그것은 현대적 일상성에 대한 문학적 탐색과 폭넓게 연결되면서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유동하는 삶의 불안과 슬픔을 현대인의 존재론적 지표와 연결시키는 이 소설은 도시 거리의 풍경을 세밀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일상의 사물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작가의 따듯한 시선은 자칫하면 풍속화의 일부로 떨어질 수 있을 에피소드에 ‘거리의 상상력’이 주는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소통에 대한 진지하고 따뜻한 시선이 이루어낸 이야기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연마해온 글쓰기의 공력이 스며들어 있는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소설이 추구하는 문학적 소통에 대해 든든한 신뢰감을 갖게 한다.

대표 집필 백지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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