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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더 큰 대한민국’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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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시아 정상들은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동아시아 정상회의,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일 년에도 몇 번씩 만나 아시아인들 간의 친밀감(Chemistry)을 키운다. 한·중·일 정상회의도 정례화로 틀이 잡혔다. 3월에는 아시아판 국제통화기금(IMF)으로 발전할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CMIM)’가 기금 1200억 달러로 출범한다. 인도양에서 북태평양까지, 아시아에 변화의 쓰나미가 몰아쳤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말한 ‘더 큰 대한민국’의 외부적인 조건은 충분하다.

아시아의 변혁 속에서 맞는 새해 아침에 아시아의 시대정신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답을 안다. 냉전 종식 후 지난 20년 동안의 변화로 아시아는 역사의 객체에서 역사의 주체로 16세기 이전의 지위를 되찾았다는 인식, 세계인구의 12%인 서양이 그 55%인 아시아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아시아인들의 문화적·도덕적 자신감이 그것이다. 종이와 화약과 활판인쇄술과 아라비아숫자를 발견한 문명·문화의 선진지역이 500년의 동면(冬眠)에서 깨어나 잃어버렸던 ‘나’를 찾았다.

중국인 정화(鄭和)가 317척의 배와 2800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태평양과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1405년이다. 그것은 4척의 배와 150명의 선원을 태운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보다 87년 앞섰다. 중국이 1400년대 후반에 원양 항해를 금지하는 해금(海禁)정책을 편 것이 아시아와 서양의 운명을 가른 분기점이다. 중국이 바다를 떠날 때 서양은 바다로 나갔다. 중국의 긴 대륙 칩거는 5세기 동안 아시아 국가들의 생존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지금 정화의 대항해 시대와 칭기즈칸의 유라시아 대륙 통일의 시대를 돌아보는 것은 그것이 아시아인들이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용납한 백인 우월주의를 씻는 최상의 해독제여서다.

한국 앞에 펼쳐진 기회는 무한대로 넓다. 세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유치하고, 중동에서 200억 달러 원전공사를 수주했다는 희소식과 함께 맞는 21세기 한국의 두 번째 10년대의 출발은 상서롭다. 문제는 내부의 조건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말한 우리의 삼류정치의 현장, 이회창 선진당 총재가 야만의 시대라고 부른 여의도를 돌아보면 기업들과 정부가 밖에서 올린 성과가 일회용으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비전도, 리더십도, 협상 수완도, 염치도 없는 난폭한 정치가 저렇게 시퍼렇게 살아 꿈틀거리는데도 가요·드라마·스포츠·국제기구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발군의 활동으로 한류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닌가 싶다. 아, 삼류의 점수를 주기도 아까운 저런 정치만 없었다면, 하는 탄식이 나온다.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옆 사람의 손을 잡고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옆 사람이 누구인가. 내 동지와 친구뿐 아니라 정당과 이념과 계층과 세대의 ‘저쪽 사람’도 옆 사람이다. 외국인 근로자들과 외국인 아내들과 북한을 탈출한 새터민들도 옆 사람이다. 북한도 옆 사람이다. 우리는 단일민족의 신화에 갇혀 타자(他者)를 배척한다. 이 대통령은 G20으로 한국의 국격을 높이자고 하지만 타자를 포용할 줄 모르면 올림픽·월드컵·G20이 국격을 올려주지 못한다.

타자와의 활발한 소통으로 국력이라는 분모를 키우면 북한을 포함한 국내외 현안이라는 분모는 저절로 해결 가능한 수준으로 작아질 것이다. 무조건 사회통합은 현대사회의 생존조건인 다양성의 요구에 배치된다. 통합보다 소통이다. 정주(定住) 체질의 나무는 제자리에 꿈쩍 않고 서서 옆 나무의 손을 잡지 않지만 유목 체질의 나무의 땅속줄기(rhizome)는 옆의 줄기들과 얽히고 소통하고 횡단한다. 한국의 정치인들과 외교·남북문제 담당자들은 정신적인 유목민이 되어 땅속줄기의 지혜에 주목해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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