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1910년 1월 1일, 한국과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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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1일자에 따르면 총리대신이던 매국노 이완용은 정초에 서울의 대한의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는 열흘 전인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다 22세의 젊은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순종 황제는 이완용에게 녹용과 인삼을, 전임 황제 고종은 치료비 500환을 하사했다고 매일신보는 전하고 있다. 매일신보는 동시에 ‘이완용씨의 아들·조카들이 수발을 핑계로 대한의원에 들어가 병실을 지키던 관리들에게 술을 내놓으라고 밤낮으로 괴롭히고 있다. 견디다 못한 한 관리는 (일부러) 시고 떫은 술을 사놓았다가 내주었다’는 기사를 게재해 매국노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다.

매일신보는 한국(대한제국)에 상주하던 일본인 사회의 분위기도 전했다. 일본인 경성통신사 직원들이 1일 “보호정치를 끝내고 일본과 한국의 정치 관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합방)해야 하며, 동포(일본인)들의 한국 이민을 장려해 국민의 경제적 기초로 삼자”는 내용의 엽서를 각계에 돌려 한국인들이 비분강개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1월 5일자 신문은 한 일본인이 “일본이 보호조약(1905년)을 맺긴 했지만 아직도 행정권만은 한국에 있으니 이 제도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입버릇 괴악(怪惡)하다’고 일침을 놓았다.

반면 같은 시기의 일본 신문에서는 ‘먹히는 자’가 아닌 ‘먹는 자’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1월 3일자 ‘중외상업신보’(니혼게이자이 신문의 전신)에는 ‘한국의 저명한 유생(儒生)인 괴산군의 백창기 외 4명이 어제 합방에 찬성한다는 뜻을 통감부와 내각에 전했다’는 아전인수격 기사가 실렸다. 5일자 신문엔 ‘통감정치를 재고할 때가 됐다. 조약(을사늑약) 개정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논평을 실었다. 한국을 집어삼킬 때가 됐다는 시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 국민 누구나 아는 대로다. 통감부는 독립적인 논조를 유지하던 대한매일신보를 이해 5월 21일 700파운드를 주고 매수했다. 눈엣가시를 제거한 것이다. 소네 통감은 합병을 보지 못하고 위암으로 죽었지만, 대신 데라우치가 새 통감으로 부임해 강제합병을 성사시켰다. 8월 22일 합병조약이 체결됐고, 일주일 뒤인 29일 공표가 이루어졌다. 이완용은 조약 체결 후 데라우치에게 “산업을 장려해 주고, 왕실을 각별히 예우해 달라”고 구걸했다. 데라우치는 “세계적 난업(難業)을 수행하는 데 한 명의 군대도 움직이지 않았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다”며 뻐겼다. 순종은 합병에 즈음한 교지를 내려 “이전부터 믿고 의지해 온 대일본 황제에게 통치권을 넘기노니 관리와 백성들은 나라의 형세와 현재의 조건을 깊이 살펴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 일본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고 행복을 함께 누리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융희 4년’은 ‘메이지(明治) 43년’으로 바뀌고 말았다.

100년 전 한·일의 고신문을 뒤적이다 보면 새삼 등골이 서늘해지고 식은땀까지 난다. 이런 지지리도 못난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나라에든 개인에게든, 위기는 언제 어디서나 형태를 달리 해 찾아오게 마련이다. 2010년 새해, 대한민국의 국운이 한껏 솟아오르길 기원한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