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홍은표 전 서초구청 공원녹지과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지난 9일 61세를 일기로 별세한 홍은표(洪殷杓)전 서초구청 공원녹지과장은 한평생을 산과 나무와 함께 한 성실한 공무원이자 가장이었다.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강원대 임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임업직 공무원으로 35년을 근무했다.

특히 고인은 1994년부터 99년 12월 정년퇴임 때까지 서초구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청계산과 우면산이 서울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산으로 만드는데 온갖 정성을 바쳤다.

산속에서 핸드폰 통화가 되지 않는다는 등산객의 불만을 귀담아 듣고 청계산 꼭대기에 SOS 공중전화를 설치한 것도 그였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산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잡목을 정리, 이를 등산객들을 위한 계단조성 및 야생동물 숙소로 재활용하기도 했다.

5년간 함께 근무한 서초구청 공원녹지과 김진구(金鎭求.52)시설계장은 "과장님은 야생동물 먹이주기.생태자연학습장 조성.꽃 직거래장터 개설.주민 체육시설 단장 같은 활동을 통해 동물과 식물, 인간이 공존하는 환경조성을 실천한 분이셨다" 고 말했다.

특히 봄철이 되면 산불에 대한 염려로 주말에도 거의 산에서 살았다. 그의 집 거실탁자에 올려진 '비상연락망' 맨 앞 페이지는 '산불 취약지' 라는 제목으로 직접 정리한 31곳의 위치와 서너 명씩 되는 연락인들의 명단으로 빼곡했다.

청계산 자락에 사는 주민 정영자(鄭英子.48)씨는 "언젠가 밤 10시 넘어서 산에 오르시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내일 아침 일찍 회의가 있는데 어떻게 해놨는지 먼저 현장을 봐야할 것 같아서요' 라고 해 감명을 받았다" 면서 "어떻게 술.담배도 안하시고 산에서만 사시던 분이 폐암으로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다" 고 안타까워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언제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가장의 모습으로 가족들에게 각인돼 있다.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청계산과 우면산을 둘러보고 출근한 아버지에 대해 아들 성현(性炫.30)씨는 "83년께 서울대공원 식물과장을 맡으시고 멋진 식물원을 꾸미고 싶으시다며 온갖 자료를 가져와 공부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고 말했다.

여동생 영숙(英淑.52)씨는 "오빠는 어릴 때부터 식물채집을 매우 잘했고,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마당에 은행나무.밤나무를 심고 애지중지 보살폈던 기억이 새롭다" 고 전했다.

서초구 원지동.신원동 등에서 소규모 농사를 짓는 농업인 후계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각별했다. 행정적 문제가 생기면 그가 먼저 앞장서 처리했다. 그래서 영안실에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농군들이 줄을 이었다.

대원농장의 김대원(金大元.46)씨는 "공무원이 아니라 이웃집 형님 같으신 분이셨죠. 함께 판로 걱정도 해주시고 무슨 행사가 있으면 꼭 오셔서 격려해 주셨는데…" 라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조남호(趙南浩)서초구청장은 洪과장의 출.퇴근길이었던 청계산 굴다리 입구에 그의 공을 기리는 표석을 세우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제 그의 산 사랑 정신은 길이 남게 된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좋아했던 '영원한 산사나이' 홍은표 과장. 그는 여전히 청계산 수목속에 있다.

정형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