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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차례] "적게…함께…즐겁게 상 차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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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제 가족을 위해 아버지와 남편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주부가 웃어야 가정과 사회와 세상이 즐겁게 되니까요. 어머니, 아내와 함께 즐기는 명절. 그것은 꿈 많고 귀여운 우리의 어린 딸들 앞에 펼쳐질 대한민국의 희망입니다.

▶ "형님이 이 붉은 피망을 좋아하시거든." "맞아요! 그럼 이것 넣고 샐러드 만들어 차례상에 올려 볼까요?" 23일 오후 인근 E-마트에서 퓨전 차례상을 준비하기 위해 장을 보고 있는 박진하.박가야씨 부부. 최승식 기자

"송편은 떡집에서 사고, 전은 대구.표고.고구마 3색전을 부쳐볼까? 고구마전이 제일 쉬우니 올해는 전 부치기에 한번 도전해 봐요."(아내)

"그려, 메뉴는 자네 맘대로 하고 장보기는 내가 확실히 하지 뭐."(남편)

오순도순 정겨운 이 대화는 환갑을 코앞에 둔 박진하(60.경기도 부천시 고광동).박가야(59)씨 부부가 올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며 나누는 얘기다.

집안의 둘째인 박씨 부부가 추석 차례상을 차리기 시작한 것도 벌써 8년째. 설날과 시어머니 제사는 박씨의 형님집에서, 추석과 시아버지 제사는 자신이 하겠다고 아내 박가야씨가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부터다.

"명절은 즐거워야 하는 것 아닌가요? 누구에게는 축제고 누구에게는 고통의 명절이라면 사양해야죠."

박가야씨는 "돌아가신 시부모께서 작은 아들집도 구경하고 싶지 않겠느냐"며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에는 25년 동안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봉사한 형님 가족에 대한 감사함이 담겨 있었다.

가족 모두는 그의 제안을 크게 반겼다. 시아주버니인 박정하(62.서울 행당동)씨가 "제수씨, 올해만 하고 내년부터는 우리집에서 그냥 하지요"라고 점잖게 사양했지만 박씨의 추석맞이와 시아버지 제사상 차리기는 그때 이후 계속됐다.

주변에서 "제사나 명절을 나눠 하면 고인이 집을 찾겠느냐"고 빈정대면 "산 사람도 집을 찾는데 영혼이 왜 아들 집을 못 찾겠느냐"고 일축했다.

대신 박씨 부부는 추석 차례 문화를 확 바꿨다. '적게, 함께, 즐겁게'가 그들이 정한 모토.

우선 차례상의 메뉴를 '다운사이징'했다. 가족들이 잘 먹지 않는 생선은 단 한 마리만 준비했다. 산적은 아예 없앴다. 시부모를 비롯, 온 가족이 좋아하는 생선회는 박씨 부부 집에서만 볼 수 있는 차례 음식이다. 시어머니가 생전에 좋아했던 바나나와 찹쌀떡도 빠뜨리지 않았다. 제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 평소 아껴둔 깨끗한 그릇에 보기 좋게 담았다.

일이 힘들면 명절이 즐겁지 않고 친척도 반갑지 않은 법. 그래서 부천 춘의종합사회복지관의 한글학교 선생님인 아내와 사업에 바쁜 남편은 차례 준비에 '아웃소싱'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다.

"딸(32)은 결혼했고 아들(29)은 일 때문에 바쁘니 함께 송편 빚을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송편은 해마다 떡집에서 삽니다. 차례를 지낼 때는 '부모님! 올해 송편을 만든 떡집의 손맛이 좋은가요'라고 묻고는 온 가족이 한바탕 웃지요."

남편은 "형식이나 절차에 얽매이기보다 기쁜 마음과 정성을 담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박씨 부부가 즐거운 명절을 만드는 데는 남편의 도움이 컸다.

아내가 명절 부담을 나누겠다고 자원하고 나서자 남편도 팔을 걷어붙였다. 차례 메뉴로 뭘 할까 아내가 끙끙대면 말대답도 해주고 장보기엔 언제나 앞장섰다. 그릇을 하루 전날 꺼내 씻고 과일을 골라 담고 음식을 나르고 상을 차리는 정도는 알아서 척척했다. 손이 가는 나물 다듬기, 갈비의 기름 잘라내기, '동그랑땡' 부치기 등을 하느라 남편의 손도 하루 종일 쉴 새가 없었다. 추석날에도 아침밥을 먹고 나면 큰집.작은집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상을 치우고 설거지도 함께한다.

"공처가도 아니고요, 게다가 페미니스트는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30년 이상 함께 살다 보니 놀아도 같이 놀고 일도 같이 하니 좋은 거지요. 덩달아 명절도 즐겁고 가족이 모이면 웃음꽃이 피지요."

박진하씨는 "핵가족 시대에 큰집만, 여자들만 명절 준비하느라 녹초가 돼서야 집안이 화목해지겠느냐"고 반문했다.

차례가 끝나고 오후가 되면 박씨 가족이 가는 곳은 노래방. 시아주버니와 제수씨가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쌓인 피로도 노랫가락과 함께 날아간다고. 게다가 음악 하는 박씨 부부의 아들과 의대생 조카, 그리고 때론 시집간 딸과 사위까지 합세하면 명절 분위기는 한껏 고조된단다.

"명절이 기다려진다고 하면 믿을까요. 하지만 만나면 반갑고 즐거우니 기다려질밖에 없지요."

지난 23일 오후 9시 함께 추석장을 보던 박씨 부부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moonk21@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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