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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CEO의 솔직담백 경영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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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호 24면

흔히 위기(危機)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한다고 한다. 그러나 위기 때 기회를 잡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자칫 발을 헛디뎠다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경쟁자가 우글거리는 기업 세계에서야 더 말할 나위 없다. 지난해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세계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한국 경제 역시 원화 가치가 급락하고 외환보유액에 경고등이 켜지면서 크게 흔들렸다. 이럴 때 기업 생사의 열쇠를 쥔 최고경영자(CEO)는 어떻게 사태를 진단하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낼까.

‘CEO가 꼽은 CEO, 위기 경영의 지혜를 듣는다’ 시리즈를 마치며

이런 궁금증을 안고 중앙SUNDAY는 8월부터 ‘CEO가 꼽은 CEO, 위기 경영의 지혜를 듣는다’ 시리즈를 마련했다. 최대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를 이끄는 손경식(CJ그룹 회장) 회장을 시작으로 다음 인터뷰이를 추천받는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 갔다. 이런 방법으로 대기업 오너부터 벤처기업인, 전문경영인 등 19명의 CEO가 지면에 등장했다. 이 시리즈는 동료 기업인 간 응원과 격려, 벤치마킹의 장(場) 역할을 했다. 한 기업인은 “중앙SUNDAY는 회장님이 취재 섭외를 해 주는 매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외환위기 극복 경험이 큰 자산
이들에게 던진 공통 질문은 언제가 가장 어려웠으며 당시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대다수가 외환위기 때를 꼽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고금리 처방과 원화 가치 급락이 치명타가 됐던 것.

손경식 회장은 “연간 10억 달러어치의 곡물을 수입하는 데 대외 신인도 하락으로 수입이 사실상 막혔었다”고 회고했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외환위기 후 2~3년간 자산운용 손실이 2조4000억원에 달했다”며 “임원 워크숍에서 ‘교보생명 부도’라는 깜짝쇼를 연출해 위기의식을 공유한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언론 인터뷰에 처음 나선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역시 “삼성에서 분리한 이후 외환위기 무렵 자산을 11조원까지 불렸다. 당시 매출이 4조원대였으니 재무적으로 문제가 심각했다”고 말했다. 현대산업개발(정몽규 회장)은 8000가구나 되는 미분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 강남에 짓던 신사옥까지 팔아야 했다.

지금은 어떨까.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도 대부분 여유 있는 표정이다. 어지간한 위기에 흔들리지 않을 체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신창재 회장은 “순이익이 업계 1위로 이젠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고 자랑했다.

이들이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재무 안정성이다. 기업 경영에 내실이 최고의 가치가 된 것이다. 조동길 회장은 “상대가 아무리 예뻐 보여도 과잉 차입으로 사는 건 절대 금물”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그룹 외형이 위축된 것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재계 순위보다 자산 회전율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김정완 매일유업 부회장은 “매출이 줄어도 1등 브랜드만 늘어나면 된다”고 했다. ‘까스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의 윤도준 회장도 수억 년을 생존해 온 바퀴벌레를 예로 들면서 “외형 경쟁은 안 한다. 내실이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비즈니스 타이밍이다. 고객의 욕구에서 반 발짝만 앞서 가라는 것이다.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은 “경영은 타이밍의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최근에 유기농 사업을 벌이고 있는 김정완 부회장도 “사업은 언제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가 성공 열쇠”라고 말했다. 서정호 앰배서더호텔그룹 회장 역시 “사업 성공은 수요 파악과 타이밍이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실속형 호텔 ‘이비스’ 브랜드를 론칭해 성공시켰다.

그러나 기업 혁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냉정한 솔루션과 실천이다. 박용만 ㈜두산 회장은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사활을 걸고’ 같은 감상적인 표현보다 즉각적이고 강력한 실행이 위기를 돌파하는 해법”이라고 조언했다.

이들의 요즘 화두는 신성장 엔진 찾기다. 김윤 삼양그룹 회장은 “2년여 동안 서랍 속에 넣어 둔 해외 진출 전략을 다시 검토하고 있다”며 ‘글로벌 삼양’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석유화학·의약바이오 분야가 이 회사의 신수종 사업. 김 회장은 15년 뒤 삼양이 ‘100년 기업’ 될 땐 ‘완전히 다른 회사’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구자열 LS전선 회장의 행보도 돋보인다. LG에서 분리한 뒤 LS전선은 전선업계 세계 7위에서 3위로 도약했다. 이 회사는 미국 SPSX 인수, 중국 홍치전기 인수, 해저 케이블 개발 같은 뉴스를 쏟아 내면서 7조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다. 구 회장은 “프랑스 넥상스, 이탈리아 프리즈미안을 제치고 2015년 세계 1위에 오를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희상 운산그룹 회장은 식량자원 확보에 승부수를 던졌다. 중국 칭다오(靑島)에 사료 공장을, 캄보디아 바탐방에 옥수수 건조장을 지었다.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연중 200일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단다. 김정완 부회장은 전북 고창 일대에 유기농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2년은 이 사업에 매진할 것”이라고 했다. 면방에서 출발해 패션과 알루미늄 사업까지 진출한 서민석 회장은 요즘 바이오·신재생에너지 사업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중소·벤처기업 CEO에겐 ‘매출 1조원 클럽’ 가입이 관심사였다.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은 “뉴럭셔리 층을 타깃으로 MCM 브랜드를 2015년까지 연매출 1조원 브랜드로 키울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토목자재 사업을 새로 시작한 이희자 루펜리 사장도 “앞으로 5년 안에 매출 1조원을 달성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보안장비 전문업체인 아이디스의 김영달 사장 역시 “앞으로 보급형 제품을 늘리고 출입통제 시스템 등 신시장에 진출해 2017년엔 매출 1조원을 돌파하겠다”고 선언했다.

“회장님이 취재 섭외” 농담도
경영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한 CEO의 비법도 저마다 독특했다. 이희상 회장은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 출근해 부친인 고(故) 이용구 회장 영정 앞에 향을 피우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한다. 기업가로서 초심을 다잡는 그만의 방식이다. 윤도준 회장은 도서관을 연상케 하는 집무실을 공개했다. 앉으면 졸린다고 선 채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든 독서대가 인상적이었다. 이강호 한국그런포스펌프 사장은 ‘배움 경영’이 돋보였다. 이 회사에서만 20년째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그는 매주 두세 차례 외부 강의를 듣는다. 중국어·일본어 학습도 꾸준히 한다. 학습하는 조직, 학습하는 사람이라야 경쟁력이 생긴다는 소신에서다.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은 ‘감성경영’ 전도사다. 그는 임원을 집으로 초청해 ‘시네 데이트’를 즐기고, 계열사인 무주리조트에서 토요음악회를 열고 있다.

추천을 주고받은 CEO 간의 인연도 눈길을 끌었다. 여섯~여덟 번째 인터뷰이였던 정몽규 회장, 김윤 회장, 구자열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 동문으로 끈끈한 관계를 이어 가는 사이였다. 김영호 일신방식 회장은 ‘업계 선배’라며 서민석 회장을 추천했는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문화예술계 후원 라이벌(?)이기도 했다.

CEO들의 소탈한 면모도 엿볼 수 있었다. 조동길 회장이 소개한 좌우명은 ‘겸손하게 살자’다. 미국 유학 시절 용돈을 월 50달러씩 받다 보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이것이 큰 인생 경험이 됐단다. 서정호 회장은 “남에게 보여 주기 민망하다”며 자신의 좁은 집무실을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직원들이 신경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 호텔 뒷문으로 출입한다. 요즘 짧은 글을 주고받는 ‘트위터’ 활동에 열심인 박용만 회장은 “짬짬이 ‘미드(미국 드라마)’와 개그콘서트를 즐긴다”며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데 유용하다”고 말했다. 신창재 회장은 가끔 보험설계사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는 행사를 연다. 그는 “회장이 제왕처럼 통치하는 것은 옛날 얘기”라며 직원들 앞에서 망가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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