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거기 휴전선이 있었네] 10.끝 비바람 긴세월 6월의 노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세월은 무정하다.

그 3년의 참혹한 혈전(血戰)으로부터 반세기가 흘러갔다.

이제 휴전선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의 6백리 산야에는 그 지긋지긋한 비방(誹謗)방송의 스피커도 입을 다물어 온 천지가 괴괴해졌다.

자연은 역사를 잠들게 한다. 아무리 큰 덩어리 역사의 흔적일지라도 자연과 시간은 그것을 어느 사이엔가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은혜일지 모른다. 왜냐 하면 그런 흔적을 과거로 돌려 놓아야 새로운 역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각은 때로 구원(救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자연 이상으로 역사도 이전의 역사를 잠들게 할 때가 있다. 그렇더라도 아직은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전사자와 온갖 희생자 몇백만의 죽음들은 살아 있는 자의 기억 속에 선열하게 들어 있어야 한다. 휴전선 일대를 허위허위 오르내리는 며칠 동안 나는 줄곧 그 죽음들을 머리 속에 채우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되풀이된 고지 탈환에서 쓰러진 병사와 단 한 차례의 방어전에서 한꺼번에 3만명이나 죽어간 병사들이 내 휴전선 여행의 한 주제이기도 했다.

한 유엔군 흑인 병사는 "인간에게는 태어난 곳이 고향이지만 죽는 곳이 고향이기도 하다" 고 말했다. 그 병사의 죽음도 떠올렸다.

서부전선 그리고 백마고지, 저격능선, 백골OP, 철(鐵)의 삼각지, 누에능선, 계웅산OP, 김일성 고지, 스탈린 고지, 대성산과 펀치볼, 향로봉, 건봉산 그리고 동해안 비무장지대 717OP에 이르기까지 그 숱한 격전지들은 조국의 양쪽 젊은이들이 적(敵)과 적으로 싸우다 산화한 곳이다.

어찌 이곳 뿐이랴. 한반도 전체가 싸움터였고 병사들이 죽어간 곳이었다. 오늘의 휴전선은 바로 그러한 싸움과 죽음 위에 그어놓은 분단의 전선이기도 한 것이다.

그 죽음 없이 어떤 평화도 시작될 수 없었다. 그 영령들의 생짜 희생 없이 그들이 싸웠던 전쟁의 의미를 다른 의미로 변화시킬 수 없었다.

해방을 앞두고 냉전체제를 구상한 미(美).소(蘇) 장교들이 단숨에 그어놓은 38선으로 조국은 두 동강이 나 버렸고 그 분단의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성전(聖戰)과 냉전세력의 성스럽지 않은 대리전에 우리 자식들의 생명과 재산을 송두리째 바친 것이기도 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나눠지기 전의 중학교 상급반에서부터 20대 청소년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억압과 궁핍 속에서 제대로 자라나지 못했다. 기계충과 말라리아를 앓고 부황 난 누런 얼굴로 밥 대신 물을 채운 헛배의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그런 굶주림의 소년시절에 해방을 맞았다가 싸움터에 내몰려 나왔던 것이다. 때로는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총알받이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수류탄 하나로 탱크를 폭파시킨 용사이기도 했다.

죽어간 자는 말이 없었다. 그 죽음 속에서 다리 하나가 없어진 중상자가 있었고 손목이 쟁강 잘려나간 장애인이 돼 후송병원에서 쇠갈고리 손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생존자들은 그 뒤의 곡절많은 세상살이에 동참했다.

하지만 고지의 참호(塹壕) 언저리에서 피범벅으로 널브러진 전사자의 죽음은 모든 것을 마감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오랜 농경사회의 부모에게 영영 돌아갈 수 없었고, 돌아가서 아리따운 처녀를 만나 장가가는 신랑이 될 수도 없었다.

만약 그들이 그 전쟁의 비극으로부터 살아 남았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온갖 결핍을 메워주는 여러 분야의 소중한 실체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 나머지 전후의 악착같은 생존 의지나 그 뒤의 산업화 과정의 이기주의와 욕망들로 얼룩진 오욕을 정화시킬 수 있는 영혼의 능력이 그들 중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죽음은 그것이 처절한 것일수록 역사에 바쳐진 순결 자체였다.

그토록 아까운 생명들이 이 강산의 흙으로 돼 버린 비극이 50년 세월이 지나갔다고 해서 어영부영 없어져서는 안된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그들은 이 세상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함께 70, 80세의 자연수명을 다하고 자손의 애통 가운데서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토록 천금같은 삶을 조국을 위해서 깡그리 헌납해 버리고 자신의 넋은 구천을 떠돌고 그 뼈는 황토 무덤속에 묻힌 것이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다른 지역의 묘지들을 떠올렸다. 북한 인민군의 시체를 모아서 묻은 경기도 파주시의 묘지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의 유엔군 묘지도, 바다 건너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 전사자 묘지와 중국의용군의 묘지도 떠올렸다. 또한 북한 평양 교외 대성산의 열사릉과 전사들의 혼백들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죽음들이 있었기에 역사는 그 원한과 긴장을 체험하고 이제 적으로서의 분단을 변화시키는 시대의 숭엄한 전환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한국전쟁 50년의 의미는 고도로 승화(昇華)되는 것이다.

그동안 휴전선은 밤낮 없는 대결과 감시로 살아왔다.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적대관계였다.

나는 70, 80년대 여러 차례 감옥생활을 체험한 일이 있다. 그곳에 들어가면 2년까지는 감옥의 벽이 그야말로 벽이었다가 2년 뒤부터는 그 벽 안의 생활에 길들여져 어느새 벽은 내 '안전' 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는 것이다.

휴전선도 우리 민족의 고통스러운 분단 장벽인데 차츰 그 분단의 '울타리' 에 길들여져, 도리어 이전의 하나가 낯선 것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 이 사실을 뼈아프게 각성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풍속 15m로, 돌이 날고 사람도 날려버린다는 향로봉 정상의 한 교회(향로봉 불빛교회)에서 중대 병사들에게 몇마디 말을 들려주었다.

"우리 세대가 전쟁에 나가 싸웠으나 그 싸움의 결실 없이 지금 마음껏 꿈꾸어야 할 그대들에게 이 험준한 고지에서 수고 많은 낮과 밤을 지속시키게 하고 있는 현실이 미안할 따름이다.

"

내무반에는 '철책을 친구같이 반겨 주자' '산악을 평지같이 이용하자' 는 등의 구호들이 적혀 있었다.

그 젊은 병사들이 있는 향로봉 위 하늘 속에 내 어설픈 진혼가(鎭魂歌)를 들어야 할 수많은 영령(英靈)들의 넋이 가없이 푸르렀다. 오오 이 강산의 영령들이여….

시인 고은

휴전선 답사단 명단

강요배(화가) 고은(시인) 공지영(소설가) 김귀곤(서울대 교수.환경생태학) 승효상(건축가) 안병욱(가톨릭대 교수.한국사) 유홍준(영남대 교수.미술사) 이종석(세종연구소 연구위원.남북관계) 중앙일보〓김준범(정치부 부장대우).안성식(사진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