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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세대] 2. 그들만의 언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20일 오후 11시 30분. 학생들이 많이 찾는 신촌의 한 PC방.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진한 화장에 튀는 옷차림이었어요. 밤 늦은 시간에 '뜻밖이다' 싶었는데 하나 같이 화상 채팅에 푹 빠져 있더라고요.

화상 채팅을 시작한 지 한달쯤 됐다는 김모(20.Y대 1년)군의 설명이에요. "문자 채팅보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열려 있는 화상 채팅에 더 신뢰가 가요. 연예인처럼 화면에서 자기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도 재미있잖아요. "

여성 전용 PC방을 주로 찾는다는 이모(21.S대 2년)양은 입술 화장이나 헤어 스타일.카메라 각도 등 나름대로의 연출 요령이 있답니다.

"카메라는 정면보다 45도로, 파운데이션과 볼터치를 이용한 입체 화장법, 백열등보다 얼굴을 화사하게 보이게 하는 할로겐 램프를 사용하죠. 또 불을 끄고 얼굴 앞부분만 비추면 환상적인 분위기를 끌어낼 수 있어요." 그야말로 이미지 세대죠? *^^*(웃음) 그뿐만이 아닙니다.

며칠 전 친구가 운전면허를 땄다며 증을 보여주더라고요. 그런데 앗! 얼굴이 완전 딴판. '예술' 이었습니다.

"너, 화장발이지?" 하고 물었더니 하는 말. "컴터(컴퓨터)로 다 고쳤다" 는 겁니다.

'내 이미지는 내가 관리한다' 는 거죠. 또 요즘 입시 문제집 고르는 법 아시나요? 고3 수험생에게 과외를 가르치는 제 친구는 문제집을 고르기 위해 아이들과 서점에 가면 한마디만 한대요. "너한테 맞는 문제집을 골라봐" 라고. 난이도나 출제 유형은 2순위죠. 표지와 내부 디자인, 편집 아이콘과 답지의 모양, 종이 재질 등이 최우선이랍니다.

그래야 애들이 문제집을 안버리고 끝까지 푼다나요. 그래선지 이미지에 익숙한 청소년들이 n세대로 규정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른들의 생각과는 좀 다르죠. 단순히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생산하고 개성껏 써먹는 세대니까요.

이미지의 생산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만 그리 특별할 것도 없어요. 그건 그들 생활의 일부분이죠. 문자로 자극을 받아 그걸 머리 속에서 재조합해 다시 문자로 표현했던 선배들과 달리 그들은 이미지로 자극을 받고 다시 이미지로 표현하죠. 그러다 보니 말도 길게 풀어 쓰지 않고 압축해 쓰고 거기서 느낌과 정보를 동시에 취하는 거죠.

대자보라고 아시죠? 예전에는 '자보체' 라는 비슷비슷한 글씨체에 검은 먹 일색이었죠. 요즘은 그림도 넣고 중간제목도 크게 써요. 종이 낭비라고요? 도리도리. 이미지 시대잖아요. 글씨만 있으면 아무도 안 읽어요.

지난해 총학생회장에 출마한 모 후보는 상당한 미남이었어요. 선전부에서도 그걸 노렸는지 벽보 전체를 얼굴 사진으로 메웠어요. 고학번들은 싫어했지만, 솔직이 저학년에겐 그 후보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죠. ;-)(윙크)

채팅 언어도 그래요. 자기가 직접 만든 이모티콘(emoticon.기호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얘기해요. 세종대왕처럼 언어를 창조하는 셈이죠. 이런 창조성이 '핸드폰' 이란 상업적 틀 안에 머무르는 건지, 아니면 그것을 뛰어넘는 뭔가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여튼 언어의 헤게모니가 문자에서 이미지로 옮겨 오는 건 보이시죠?

특히 이미지와 직결되는 대중문화 장르에서 그들의 창조성은 '짱' 이죠. 인터넷에서 소규모 '1인 방송국' 을 운영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모두가 연예인이고 모두가 PD예요. 10대들끼리만 운영하는 '사가(http://www.sagaradio.pe.kr)' 라는 인터넷 방송국도 있어요. 근데 언론 인터뷰도 거부했어요. "외부의 잣대로 자신들의 세계가 재단되는게 싫다" 는 게 이유. 멋지죠?

왜 그들은 이미지를 좋아하냐고요? "넘쳐 나는 정보에 대한 반동으로 상대적으로 단순한 이미지를 선호한다" 는 해석도 있지만 그들의 대답은 간단해요. "잼(재미) 있으니까" 예요. 재미는 그들 삶을 결정짓는 제일 요소랍니다.

농활 갈 때조차 재미 있는지 없는지로 참가 여부를 결정하는 게 그들이죠. 근데, 재미란 말은 즐겁다, 즐겁지 않다는 것과는 다른 뜻인 것 같아요. 감동이 있거나 교훈을 주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하여간 뭔가 나에게 도움이 되면 그들은 모두 '잼있다' 고 하죠.

모든 것이 재미로 환원되는 미래 사회가 불안하다고요? T - T(눈물) 흠, 그래도 그들은 기대하는걸요. 이제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남의 눈치나 체면 때문에 억지로 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겠죠? 그들은 자신의 일에서 재미를 찾을 거예요.

이강은 <서울대 역사교육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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