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기자 방북 2박3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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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평양이 변하고 있다.

6월 15일 오전 9시 백화원 영빈관에서 만수대 의사당으로 가는 길. 김대중 대통령이 탄 벤츠가 지나가자 연도에서 박수가 터졌다.

여성.청년.노인과 학생,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람까지 길을 멈추고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 평양의 변화〓기자는 1992년 2월 6차 고위급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었다.

그때 평양 시민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당시 인민대학습당에서 만난 학생, 회담장인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만난 시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을 공격적으로 질문하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기자들에게 따라붙는 안내원들도 냉소적인 감시자에서 회담결과에 관심을 보이는 동료로 변했다.

북의 실상에 대해서도 훨씬 솔직해졌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 기자를 안내하던 나운석씨는 이렇게 말했다.

전력과 식량 부족에 대해서도 인정했다.

다만 '핵 소동' 으로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겼고, 수해로 식량 공급에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합의서 서명이 이뤄진 15일 시민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워졌다.

한 안내원은 "통일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고 감격스러워 했다.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도 "98년9월 경남대 총장 자격으로 평양에 왔을 때는 주민들이 대화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훨씬 자유롭고 유연해졌다" 고 말했다.

더구나 북의 선전수단인 노동신문이 金대통령을 '대통령' 이란 호칭으로 제목을 쓴 것은 "대단한 변화" 라고 朴장관은 지적했다.

연일 1면에 金대통령의 사진과 기사를 크게 실었다.

金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었다.

한 안내원은 "과거 박정희(朴正熙)에게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 아니냐. 비교적 북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고 말했다.

다른 안내원도 "역대 대통령 가운데 북남 협력.교류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 이라고 평가했다.

◇ 주민 생활〓주민들의 옷차림에서도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군복같은 차림이 없어지고 간편복이긴 하나 서구화한 복장들이 거리를 채웠다.

서둘러 재촉하던 주민들의 걸음걸이도 훨씬 여유가 생겼다.

안내원이나 판매대에 외국 물건이 눈에 많이 띄었다.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안내원도 많았다.

매장에 있는 북한산 화장품도 투박하던 포장이 훨씬 세련미를 갖췄다.

개성화장품회사의 '머리 영양물(샴푸)' , 너와나합작회사의 '금강산 살결물(스킨로션)' 등도 서양식 디자인을 갖췄다.

상점에 전시된 북한의 음악 테이프.비디오.CD도 순수한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늘어났다.

김일성.김정일 부자 찬양 일변도는 아니었다.

92년에는 서울사람보다 훨씬 담배를 많이 피웠던 평양 시민들이었지만 지금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

金위원장이 담배를 끊으면서 금연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만찬장에 나온 술은 과거 40도를 웃돌던 것이 10도 정도의 약한 술로 바뀌었다.

金위원장이 술을 절제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평양의 밤거리도 92년보다 밝아진 편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거리에 나서면 칠흑같은 어둠이 깔려 있었는 데 이제는 아파트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주민들과 대화하다 보면 내부의 변화가 이런 외양의 변화 이상이란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안내원은 "민족이 없으면 이념이 무슨 소용입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이념과 살아가는 방식을 존중하고 강요하지 말아야지요" 라고 했다.

공격보다 공존의 논리가 퍼져있다는 분위기다.

13일 밤 평양 TV의 드라마도 김일성(金日成)이 항일운동 시절 이념에 집착해 애국적 지주를 탄압한 부하의 잘못을 사과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 경제협력〓경제분야는 변화의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인상을 줬다. 남쪽과의 경협사업에 대한 관심도 과거 어느 때보다 컸다.

한 안내원은 "경협을 하려면 기왕에 외국보다 남측과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고 말했다.

합의문이 발표된 뒤 대남 경협사업을 하고 있는 나운석씨는 구체적으로 "남쪽은 전자 등에서 일본에 가까운 기술이 있지 않느냐. 북쪽은 눅은(값싼) 임금에 질좋은 노동력이 있으니 보완적 협력을 할 수 있을 것" 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이제까지 무역을 위해 외국을 나가면 공항에서 입국심사 때마다 마치 마약거래나 테러를 일삼는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수모를 당해왔다고 한다.

때문에 남북 정상간 합의가 남북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북한의 신용과 위상을 높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남쪽 기업인과의 협력사업을 추진하면서 "계약서를 만들어 놓고 이행된 게 5%밖에 안된다" "하자고만 해놓고 결과가 없다" 며 불만도 털어놓았다.

◇ 변화 배경〓무엇이 이같은 변화를 만들고 있을까.

가장 큰 원인은 김정일 위원장의 인식전환이다.

金대통령은 "金위원장이 세계 역사와 조류를 많이 알고 있고, 문제에 대해 납득이 되면 금방 수용하는 뭔가를 이루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 고 평가했다.

金위원장은 3년상을 마친 뒤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섰다.

자신의 첫번째 업적을 통일문제로 삼으려는 것 같다.

또 이를 통해 국제적 고립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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