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거기 휴전선이 있었네] 8. '전선의 봄' 알리는 손짓대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휴전선 답사 첫날, 우리를 태운 버스가 문산역을 지날 때 나는 역사(驛舍)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 곳은 내가 35개월간 군대생활을 하면서 휴가 때마다 서울행 열차를 타던 환희의 플랫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논산 군번 12151910으로 1971년 3월부터 74년 1월까지 보병 제1사단 15연대 인사과에서 근무했다. 그러니까 나는 실로 30년만에 내 20대 청춘의 3분의1을 묻은 그 곳을 찾아간 것이다.

행정병이었으니 군대생활이 고달픈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연대에 배속된 지 얼마 안돼 우리 부대는 GOP(General Out Post.남방한계선을 따라 설치된 남측 경비초소)로 들어갔다.

경계초소가 많은지라 행정병도 밤마다 2인 1조로 2시간씩 물탱크 보초를 서야 했다.

전선의 밤은 왜 그리 길고 조용하던지, 밤마다 소쩍새는 왜 그리도 구슬피 울어대던지…. 전방에 도착하면 우리는 항시 그 곳 부대장의 안내를 받았다. 연대장이나 대대장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들의 계급장을 보는 순간 꼭 경례를 올려야 할 것 같은 긴장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30년 전 내 처지와 똑같은 사병들에게 나도 모르게 눈길이 돌려지곤 했으며 그러고 나서야 심적으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전진부대 도라전망대 가까운 곳에 있는 제3땅굴은 정말로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지하 74m 깊이에 긴 터널을 뚫은 것인데 그 진입로는 경사 15도의 3백m 비탈길이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세배는 더 길었다.

땅굴에 들어가 북쪽으로 5백m를 더 가다 보니 남방한계선상에 2명의 보초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나는 보초에게 온정을 다해 물었다.

"몇 시간 근무합니까?" "4시간 만에 교대자가 나옵니다." "병장이군요. 제대는 언제 하지요?" "3개월 12일 남았습니다."

나는 그 끝자리 '12일' 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오늘밤 자고 나면 11일이 남겠지. 하루는 잘 가는데 그 놈의 한 달은 왜 그리도 더디던지.

답사단 중 내게 주어진 몫은 휴전선의 문화유산에 대해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더 관심을 가진 것은 휴전선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장교와 병사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답사 중 말단 소대 내무반을 꼭 한 번 보리라 마음 먹었다. 병사들의 일상생활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이런 계획이 병사들에게 알려진다면 소대원들이 갈고 닦고 치우느라 생고생할 게 뻔해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이제나 저제나 기회를 엿보던 중 남달리 융통성이 있어 보이는 백골부대 정훈참모 강덕찬 소령에게 넌지시 속내를 털어 놓았더니 계웅산OP에 오를 때 한 소대 내무반을 보여주었다.

요즘의 내무반 풍경은 그 옛날과 많이 달랐다. 병사들이 지급받은 개인 피복류를 정돈해 두는 관물대부터 달랐다. 옷을 가지런히 정돈하기 위해 '쫄대' 라는 걸 사용하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개인 사물함(私物函)도 넉넉했고 저마다 애인 사진들도 붙여 놓고 있었다.

무엇보다 다른 것은 병사들의 잠자리인 내무반 침상(寢牀)이 나무판으로 된 마루가 아니라 비닐 장판으로 깔려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순간 강소령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면 요즘엔 '침상 3선에 정렬!' 이라는 구령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혹시 아십니까?"

하기야 모를만도 하겠지. 옛날의 침상은 널빤지를 이어 붙인 마루 바닥으로 돼 있었다.

그래서 내무반 한 가운데 있는 통로를 중심으로 침상 벽쪽으로 가면서 차례로 1선, 2선, 3선이라 불렀다.

그 3선에 발가락 끝을 나란히 맞춘 다음 부동자세를 취하면 점호(點呼)받는 대형이 갖춰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침상에 비닐 장판이 깔려 있는 지금도 구령은 여전히 '3선에 정렬'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민속학이라는 학문이 필요한가 보다.

일행이 그 내무반에 들어간 것은 오후 3시쯤이었다. 그때 소대원들은 취침 중이었다. 야간 경계근무를 위해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둑어둑할 때 근무에 들어가 다음날 해가 뜰 무렵 나오는 것이다.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말이다.

그날 숙소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울 때 나는 '그 소대원들은 지금 근무 중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옛날 고작해야 2시간 보초 서기도 그렇게 힘겨워 했는데…. 그날도 전선의 깊은 밤에는 소쩍새만 한없이 울어대고 있었다.

백마고지.펀치볼.향로봉 등 여러 부대를 거치면서 요즘 군대는 문화생활이 많은 것을 알았다.

정훈참모 밑에는 아예 '문화장교' 라는 직책이 있었다. 승리부대 문화장교는 장병들에게 보여 주겠다며 답사단과의 인터뷰를 소형 비디오에 담아가기도 했다.

향로봉(1천3백20m)중대 막사 휴게실에는 컴퓨터가 여러 대 놓여 있고 어떤 병사는 거기서 인터넷으로 뭔가를 보내고 있었다.

답사가 대충 끝날 무렵 대대장 윤상균 중령이 우리 답사단에 "병사들을 위해 뭔가 '좋은 말씀' 좀 해달라" 며 짧은 강연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1백55마일 휴전선에서 가장 고지대에 자리잡은 '향로봉 불빛교회' 에서 시인 고은씨와 나는 이곳 중대원들을 상대로 30여분 동안 그야말로 느닷없는, 내 생애 처음으로 산상(山上)강연이란 걸 하게 됐다.

나는 답사 안내를 맡은 휴전선의 여러 지휘관들과 가급적 많은 대화를 하려 애썼다.

그러느라 간간이 우스갯소리도 해 보곤 했다. 그들과의 심리적인 간격을 좁혀보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승리부대 39연대장에게 다소 껄끄러울 것 같은 질문 하나를 던져 봤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햇볕정책이 그동안 군의 입장과 배치하는 건 아닙니까. "

그러나 金대령의 답변은 당당했다. "햇볕정책은 국가의 대북 기본정책입니다.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군사력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군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막기 위해서도 존재합니다. 설사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군의 존재이유는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아름다운 해금강이 눈 앞에 바라다 보이는 금강산OP(7백11m)에서 우리는 뇌종부대 대대장 현성룡 중령으로부터 그 풍광만큼이나 아름다운 얘기를 하나 들었다.

전방의 GP(Guard Post:비무장지대 안에 설치된 남측 경비초소)와 북한측 초소 사이가 불과 6백m 밖에 안되는 곳에서는 이따금 남북한 병사들이 두 팔로 커다랗게 글씨를 써가며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지난 5월 5일 남쪽 병사가 먼저 말을 걸었단다. "얘들아, 나와라. " "나왔다. 밥 먹었냐?"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우린 그런 거 없다."

대화라고 해 봤자 그런 정도였지만 대화란 바로 그런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적개심(敵愾心)이 가득 찬 상태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대화는 이해의 시작이며 믿음과 사랑과 통일의 싹이다. 전선의 한 낮에는 그런 희망어린 얘기도 있었다.

<유홍준 약력>

▶1949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학과

▶성균관대 박사(동양미학)

▶저서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

유홍준 (영남대 교수.미술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