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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 미술관은 지금 '디지털 아트' 세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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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수백대 컴퓨터가 연결된 대형 화면에 수 천 가지 색과 음향이 퍼져나오자 사이버 캐릭터가 그 속에서 헤엄치듯 나타나 움직인다.

전시장에 있던 관람객이 신기한 마음에 화면에 다가가면 캐릭터는 이내 도망을 친다. 인터넷으로 접속해 사이버상에서 작품을 관람하던 이가 "너는 왜 도망만 다니니" 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멈칫하는 캐릭터.

모니터 옆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가 스스로 연주를 하면 캐릭터는 다시 기를 펴고 활짝 웃은 뒤 화면 속으로 사라진다. 이어 펼쳐지는 현란한 모니터들의 춤 잔치.

상상력만 있다면 어떤 형태의 미술도 창조해 낼 수 있는 시대다. 디지털과 미술의 만남도 그런 흐름의 한 줄기. 1990년대부터 멀티미디어의 접목이 활발하게 이뤄진 미술은 최근 디자인.동영상.음악이 뒤섞인 디지털 아트로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워커힐미술관이 지난 3일 첫 워크숍을 열고 구체적 실현 작업에 들어간 '일렉트로닉 캔버스(electronic canvas)프로젝트' 는 과학.예술.철학의 창조적 결합을 꿈꾸는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비상한 관심을 끈다.

일렉트로닉 캔버스란 여러 개의 웹브라우저 창을 이용해 회화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 예를 들어 컴퓨터 모니터 수 십 개를 한꺼번에 모아놓고 모자이크 기법을 이용, 모니터를 명멸시킴으로 강렬한 디지털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

백남준씨의 비디오 아트에서 도구를 비디오 대신 멀티미디어 기기로 변환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인터렉티브(상호작용)개념은 일렉트로닉 캔버스 프로젝트의 주요 요소다. 지금까지 미술은 작가의 생각을 보는 이가 느끼도록 하는 일방적인 매체였다면 일렉트로닉 캔버스는 센서 등의 독특한 장치를 이용, 전달매체와 수용자가 상호 작용이 가능하다. 관람객의 찬사를 받으면 작품이 즉석에서 감사하다는 표현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워커힐미술관이 첫 작품으로 구상해 내놓은 것이 웹과 인공지능을 이용할 '미리' (Mirre). 현재 서울 종로 SK빌딩 워커힐 미술관에 설치된 미리는 1백 대 모니터와 30대 컴퓨터가 연출하는 모자이크 예술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비디오 아트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아기와도 같다고 해서 '밀레니엄 베이비' 라 부르는 작품이다. 미술관측은 앞으로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미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장동훈 이화여대 미대 교수는 "미리는 인간의 상상력과 그에 따르는 과학기술에 의해 태어나고 자라며, 자기 복제를 하는 가상 유기체가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한다.

장동훈 교수 외에 이원곤 경주대 영상예술학부 교수와 원광연 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과 교수 그리고 노소영 워커힐 미술관장이 함께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오는 9월 디지털 아트센터 개관을 계획하고 있는 워커힐 미술관은 미리 이외에 다양한 작품 구상을 위해 인문학자.미술 관계자.컴퓨터 전문가들로 모임을 구성해 매달 워크숍을 연다.

과학기술.인문학.예술간의 창의적인 접목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문화 예술 컨텐츠를 함께 만들어갈 장기적 모임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다.

과학기술분야에서 원광연 교수 외에 미국 MIT大 미디어랩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윤송이씨가 참여하고 미술분야에선 김세훈 세종대 교수.유진상 계원조형예술대 교수.작가 이용백씨 등이 함께 한다.

또 인문학자들로는 김용호 성공회대 신방과 교수.김주환 연세대 신방과 교수.소장 철학자 김재인( '이다' 동인)씨 등이 멤버들이다. 앞으로 학자들의 참여를 더욱 늘여 나갈 계획이다.

노소영 관장은 "구체적인 성과를 내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참여자들의 열기와 관심이 높아 기대가 크다" 며 "일렉트로닉 캔버스 프로젝트가 한국 미술에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도록 하겠다" 고 말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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