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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세상보기] 작은 생선을 지지듯…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새벽바다를 내다본다. 아니다. 표현이 틀렸다. 새벽바다를 들여다본다. 아직 어두운 새벽의 푸르스름함 속에서 배들의 불빛이 보석같이 반짝거린다.

모두 어디로들 가려는 것일까.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파도 한 줌이 하얀 거품띠를 두르고 달려온다. 파도가 달려올 때는 어깨동무하며 달려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런데 파도 하나가 막 손을 내밀며 어깨동무를 하려고 하는 즈음 그 파도 위로 하얀 거품띠를 이루며 그림 하나가 떠오른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한 여자의 그림이다.

그 여자는 파도 위에서 살짝 사립문을 열고 있다. 등에는 갓난아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그 여자는 문을 열다 말고 건넌방 쪽을 한참 서서 바라본다. 다행히 아무 기척도 없다.

그 여자는 사립문을 닫고 보퉁이를 다시 보듬은 다음, 아기가 깨지 않도록 추스르면서 역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그러나 역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어찌 어찌… 그 여자는 기차에 올라탄다. 그 여자는 한밤중 어느 작은 역에서 남쪽으로 간다는 사람들을 따라 내린다.

그 사람들을 따라 한 여관으로 가서,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니 집에 두고 온 아기가 다시 생각난다. 그 여자는 여관방에서 공연히 뒤를 바라본다.

잘 있는지, 할머니가 잘해주시겠지…. 그 여자는 눈시울을 닦는다. 새벽에 그 여자는 사람들을 따라 임진강으로 간다.

가장 강폭이 좁은 곳을 향하여. 그 시퍼런 물 앞에 선다. 사람들은 살살 건너기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소리가 크게 나면 러시아 병사가 총을 쏘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아기의 입을 막는다.

유난히 잘 우는 아기였으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다 강을 건너가도 그 여자는 건너지 못하고 있다.

그 여자는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한참 그러고 있으려니 한 할아버지가 다가온다. 지게로 강을 건너게 해주겠다고 한다.

그 여자는 가진 돈을 전부 준다. 그리고 지게에 올라 앉는다.

아기의 입을 계속 막은 채… , 그 여자가 지게에서 동두천 언덕에 내렸을 때는 먼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 그 여자는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다.

나의 어머니가 뒤를 자꾸 돌아보신 건 고향 집에 남아 있게 된 나의 언니 때문이었고… 수평선에는 또 한 여자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런데 얼굴이 잘 안보인다. 나의 언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그렇게 보고싶어 하셨던 나의 언니, 아마도 지금 살아 있다면 60대가 다 되어 있을 나의 언니…. 한숨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다.

"방학이 되면 쌀가마 이고 이북 가자. 거기엔 강씨 마을이 있으니까… . "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통장 하나를 발견했다.

'이게 웬 통장이지?' 어머니는 아무도 모르게 적금을 붓고 계셨다. 이북의 언니에게 집 한 칸을 마련해 주라고.

6월이다.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다시 떠오르는 수평선의 그림들. 그녀들의 고단했던 얼굴 뒤로, 파도는 다시 어깨동무를 하면서 달려오고, 그 어깨동무한 하얀 거품 띠 위로 시인 신동엽이 인용했던 노자의 글귀 하나가 일어선다.

'치대국 약팽소선(治大國 若烹小鮮)' , 나라를 다스릴 때는 작은 생선을 지지듯 조심히 하라는 뜻. 민족시인 신동엽이 이런 글귀를 머리에 익히고 있었다니!.

그러나 오늘 보니 정말, 그렇구나. 저 밤을 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여, 若烹小鮮하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뿐 아니라 나라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들이여. 若烹小鮮하여 우리의 6월을 더욱 아름답게 하라. 북한의 아름다운 들도, 남한의 아름다운 들도, 북한의 힘없으나 아름다운 사람들도, 남한의 힘없으나 아름다운 사람들도.

강은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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