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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 가족 우울증·생활고 시달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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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현미 아빠 보세요. 노르웨이로 연수를 떠난 지 이틀이 멀다 하고 소식을 전하며 마지막 그림엽서에선 하루 빨리 한국에 돌아오겠다고 했던 자상한 당신. 그런 당신이 납북됐다는 소식은 저에게 청천벽력이었어요. 세 식구가 다시 만날 때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겠어요. "

1994년 수도여고 전 교사 고상문(高相文.51)씨의 아내 조복희(趙福熙)씨는 편지를 언론에 공개,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채 2년도 안돼 96년 趙씨는 17년간 생이별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했다. 당시 17세였던 딸은 "북한이 미워요" 라며 영정 앞에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趙씨가 결혼 1년여 만에 남편과 헤어진 것은 78년 4월. 노르웨이에서 연수중이었던 남편 高씨는 여권을 분실해 한국대사관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러나 택시기사의 착오로 북한대사관에 내린 高씨가 강제 납북당한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렸던 趙씨는 국립정신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특히 94년 국제사면위원회를 통해 남편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환청(幻聽)증세까지 나타났다.

납북자들의 가족들이 강제 납북으로 수십년 동안 고통 속에 살고 있다. 특히 정부의 무관심.무대책으로 전혀 주목을 못받아 한과 아픔은 더하다.

87년 납북된 동진호 선장 이수엽(李守葉)씨의 부인 김순근씨도 남편이 납북된 뒤 홀몸으로 아들 넷을 키우면서 기구한 삶을 살았다. 납북후 월세방을 떠돌고 식당.공장 등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마련했다.

78년 8월 전남 홍도에서 납북된 고등학생 이민교씨의 어머니 김태옥(金泰玉.69)씨는 그리움 때문에 지금도 아들 사진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또 잠꼬대를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남편은 아들을 찾으러 홍도를 돌아다니다가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쳐 고생을 하다가 93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특히 섭섭했던 것은 97년 말에야 정부가 "아들이 북한에 살고 있다" 고 알려주면서도 "이 사실이 언론에 자꾸 나가면 아들에게 해로울 수 있다" 며 입조심을 당부할 때였다.

89년 유럽여행을 하다 납북된 이제현씨의 아버지 이영욱(李永旭)변호사는 "그동안 통일부 등 정부부처를 찾아가 아들의 생사(生死)라도 알려달라고 하면 '통일이 돼야 해결이 가능하다' 는 대답만을 들어야 했다" 며 "부디 대통령이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납북자 송환이라는 선물을 가져오길 바린다" 며 눈시울을 붉혔다.

하재식.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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