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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당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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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 그림 = 박병춘

아내가 나간다. 어둠보다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마당의 병든 무화과나무를 지나, 녹슨 대문을 열고, 아내가 나간다. 아내는 모지락스럽게 대문을 철커덕 닫아걸고 돌아선다. 대문 닫히는 소리에서 금속빛 칼날의 매서움과 차가움이 느껴진다. 동시에 남자의 가슴에도 철커덕, 하고 쇠빗장이 질러진다. 돌연 긁어내고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진다. 남자는 옷가슴을 쥐어뜯는 대신 머리를 답삭 움켜쥔다. 그러나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무게를 알 수 없는 공기만이 손아귀 사이를 허허롭게 맴돌 뿐이다. 남자는 머리에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남자는 손톱을 세워 두피를 긁어내린다. 불그스름한 손톱자국을 따라 하얀 비듬이 일어선다. 그 사이에 아내는 대문 앞에 주차되어 있는 단단한 지프에 몸을 싣는다. '초보운전' 딱지가 붙어 있는 차는 모퉁이를 돌아 급하게 사라진다.

남자는 아내를 지켜보고 있던 커다란 거실 창에서 몸을 돌린다. 남자는 두 개의 은빛 바퀴를 힘차게 굴려 거실을 가로지른다. 바퀴가 지나갈 때마다 고무재질의 바닥이 뽀드득거린다. 남자의 배에서도 꼬그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식욕이 동한다. 남자는 안방으로 가려다 부엌 쪽으로 방향을 튼다. 손을 뻗어 부엌문을 빠끔히 열어젖힌다. 어두운 그 속에서 역겨운 비린내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남자는 조금도 역겹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엌으로 들어가기 전에 벽 스위치를 올린다. 부엌이 환해지면서 마당으로 난 창문과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마주 바라보인다. 저 무화과나무 때문에 불을 켜지 않으면 부엌은 한낮에도 어둡다. 창 옆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던 누군가는 나무가 클 거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 같다. 나무 둥치와 가지가 창문을 향해 심하게 휘리라고는 더더욱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사 오던 날 남자는 창을 가로막고 있던, 괴이한 형상의 무화과나무를 유심히 쳐다봤다. 부엌에서 피어오르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나무의 성장 방향을 바꿔놓은 것일까. 어찌 보면 나무는 허리를 구부려 부엌을 훔쳐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문턱이 없는 관계로 바퀴는 부엌으로 진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고층 아파트를 떠나 마당이 있는 이층집으로 이사오면서 아내는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 문턱은 모두 없앴고 바닥은 흠집이 잘 나지 않는 고급소재로 깔았다. 남자를 위한 아내의 세심한 배려였다. 하지만 아내의 배려는 거기까지였다. 살면서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한 불편한 부분들은 모두 남자 스스로 해결했다. 그 첫 번째가 부엌이었다. 현재 부엌 싱크대 높이는 보통 싱크대 높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식탁도 다리가 삼분의 일 가량 잘려 나간 것처럼 낮다. 난쟁이 부엌처럼 부엌 가구들은 모조리 낮게 움치고 앉아 있다. 제 키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위압적인 냉장고뿐이다.

남자는 요리책이 무덕무덕 쌓여 있는 식탁으로 간다. 한 권을 골라 손 가는 대로 책장을 펼친다. 소시지 전골이 나온다. 일단 재료부터 살핀다. 특별히 구입해야 할 재료는 없다. 소시지 전골은 번복되는 일 없이 남자의 아침 메뉴로 정해진다. 남자는 요리 사진과 조리법이 실려 있는 책장을 거침없이 찢는다. 이렇게 찢어내야만 같은 요리가 걸려들지 않는다. 그 때문에 한때 부픗했던 요리책은 점점 얇아지고 있다. 남자의 목표는 요리책에 있는 요리를 모두 만들고 시식해 보는 것이다. 하루에 두세 번 요리를 하는 남자가 한 달 반 동안 만든 요리 가짓수는 무려 132개나 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요리책 갈피에 붙들려 대기 중인 요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마도 남자는 늙어 죽을 때까지 요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리책은 언제든 구입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사이에 요리 연구가들은 앞다퉈 새로운 요리를 내놓을 것이다. 세계 각국의 요리까지 생각하면 남자는 오래 살고 싶어진다.

남자는 책장을 싱크대 손잡이에 매달아둔 빨래집게에 물려 놓는다. 남자는 재료와 만드는 법을 꼼꼼하게 읽어본 다음 요리를 시작한다. 일단 책장이 요구하고 있는 재료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는 불빛을 발사해 복잡한 자신의 내장을 훤히 까발린다. 마치 대형 마트에 들어온 것 같다. 최고 용량의 냉장고는 제 용량대로 충실히 식료품을 품고 있다. 남자는 소시지, 햄, 두부, 김치, 콩스튜, 라면, 각종 야채를 꺼낸다. 조리법에 나와 있는 대로 재료를 다듬고 썰고, 번호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재료를 배합해 끓인다.

시식은 몇 가지 밑반찬을 곁들여 밥 한 공기로 시작한다. 소시지와 라면사리를 한데 감아 올려 한 입에 넣는다. 혓바닥에 분포된 미뢰가 맛을 향해 돌진한다. 국물이 좀 틉틉하지만 얼큰하고 개운한 게 일품이다. 밥하는 건 물론이고 맛을 봐야 설탕인지 소금인지 구분할 수 있었던 초창기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남자는 점점 향상되고 있는 자신의 요리 실력에 만족하며 밥 두 공기를 아귀아귀 해치운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찢어놓은 책장 여백에다 맛과 보충할 사항들을 기록한다. 여행칼럼니스트로 다져진 언어감각은 맛에 대한 평가를 더욱더 세심하고도 풍부하게 해준다. 냉정한 입장에서 별점도 매긴다. 별점이 낮은 건 나중에 다시 시도해야 한다.

설거지가 끝나갈 때 초인종이 울린다. 남자는 행주에 손을 닦으며 인터폰 수화기를 든다. "아저씨, 저요." 조금 껄렁하면서도 어기찬 목소리다.

야구모자를 눌러 쓴 소년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현관으로 들어선다. 소년은 묵직해 보이는 봉지를 손에 꽉 쥔 채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다. 그러고는 남자에게 무릎과 팔꿈치를 여봐란 듯이 보여준다. 상처가 난 곳에 빨간 약이 발라져 있다. 소년의 행동은 수고를 감안해 돈을 더 달라는 뜻이다. 소년은 상처의 심각성을 부각하기 위해 일부러 약을 상처보다 넓게 발라 놓았다. 명민하다 못해 영악한 소년은 어느새 흥정과 거래의 방법을 터득했다. 노려보는 듯한 소년의 눈은 탐욕과 살의로 이글이글 타오른다. 야구공이 거실 유리창을 깨뜨렸을 때도 소년은 저 눈을 하고 남자를 찾아왔었다. 남자는 한눈에 소년을 알아봤다. 유리창 값을 물리지 않는 대신 요구 조건을 내걸면 덥석 미끼를 물 녀석이라는 것을.

남자는 부엌으로 가 삼 만원과 일회용 용기에 포장해 놓은 소시지 전골을 갖고 나온다. 남자 혼자 해치우기에 음식의 양은 너무 많다. 공들여 만든 음식을 쓰레기통에 처박느니 거래자에게 시식의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거래자는 미숙하지만 맛에 대한 평가도 잊지 않는다. 소년은 그제서야 되알진 손을 풀어 비닐봉지를 남자에게 건넨다. "이번엔 뭐예요?" "소시지 전골." "저번에 감자옹심인가 영심인가는 아주 좋았어요. 친구들도 맛있대요." 소년의 얄팍한 칭찬에 남자는 내심 기분이 좋아진다. 소년은 거래할 물건이 없어도 거의 매일 찾아와 음식을 받아 간다. 조직의 짱으로 있는 소년은 조직원들과 음식을 나눈다. "근데 이게 무슨 냄새죠?" 소년이 갑자기 코를 실룩이더니 얼굴을 찡그린다. "그만 가봐라." 민망해진 남자는 서둘러 소년을 돌려보낸다.

남자는 하의를 벗고 흐물흐물한 다리를 질질 끄집으며 화장실로 들어간다. 가랑이에 채워둔 일회용 기저귀를 빼낸다. 먹은 양이 많아 배설량도 그만큼 많다. 뭉개진 배설물에서 지독한 냄새가 풍긴다. 매일 치르는 일임에도 볼 때마다 인상이 구겨진다. 산해진미가 입으로 들어갈 때는 황홀함이 극에 달하지만 그게 소화되어 나올 때는 어떤 느낌도 없다. 그저 일이 다 끝난 뒤에야 예민해진 코가 불쾌한 냄새를 감지해낼 뿐이다. 오늘은 민망하게도 소년의 코가 먼저 사태를 감지했다. 그 찬란하던 음식이 이렇게 더럽고 냄새나는 흉물로 변하다니. 남자는 샤워기를 사타구니에 갖다대고 수도꼭지를 올린다. 세찬 물줄기가 곳곳에 묻어 있는 노란 배설물을 쓸어낸다. 아내가 직장을 나간 뒤로 남자는 기저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뽀송뽀송하고 질 좋은 기저귀에 남자의 배설을 모조리 맡겨놓은 것이었다. 기저귀를 사용한 후 도뇨관을 삽입해 규칙적으로 오줌을 빼내는 것도 그만뒀다. 감염이 우려되기는 했지만 그럴 때는 항생제를 투여하면 되었다.

해초 같은 거웃 속 페니스가 세찬 물줄기에 맥없이 흔들린다. 남자는 멍하니 쳐다보다 페니스를 움켜쥐고 주무른다. 곧추 일어서는 것 같던 페니스는 이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픽 쓰러진다. 의사는, 원한다면 발기상태를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장치를 성기 속에 삽입해 주겠다고 했다. 진동마사지기를 사용하면 사정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남자는 모두 거부했다. 남자가 아니라 아내가 거부한 것인지도 몰랐다. 남자는 갑자기 샤워기로 페니스를 세게 때린다. 덜렁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감각이 없다. 남자는 샤워기를 타일 바닥으로 내동댕이친다. 샤워기는 뱀처럼 몇 초간 꿈틀거리다 남자의 얼굴로 물줄기를 발사한다.

쇠고기크로켓. 쇠고기를 넣어 완자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참깨를 묻히면 고소하다. 재료. 쇠고기 300g, 감자 200g, 완두 2큰술, 옥수수 3큰술, 소금 약간, 식용유 약간, 달걀 1개, 빵가루, 파슬리, 붉은 고추, 참깨. 만드는 법. 1. 쇠고기를 다져 밑간을 해둔다. 2. 완두는 데쳐 다지고 옥수수는 뜨거운 물을 끼얹어 굵게 다진다. 감자는 얇게 썰어 삶는다. 3. 쇠고기, 감자, 완두, 옥수수를 섞어 소금간을 한다. 빵가루에 파슬리, 다진 붉은 고추, 참깨를 섞는다. 4. 3의 반죽을 둥글게 빚어 밀가루, 달걀물, 튀김옷을 입힌다. 5. 170℃의 기름에 튀겨낸다.

남자는 소년이 가져온 검은 비닐봉지의 매듭을 푼다. 시커먼 들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내의 머리보다 검은 털을 잡아 끄집어낸다. 고양이를 살피는 남자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희뜩 스친다. 다른 고양이들과 달리 이 암고양이는 제법 살집이 두툼하다. 평소에 사냥 솜씨가 좋았는지, 아니면 운 좋게 죽기 전에 만찬을 즐겼는지 유난히 배가 불룩하다. 남자는 고양이를 개수대에 처넣고 수도꼭지를 튼다. 뻣뻣한 고양이 털이 물에 축축이 젖는다. 남자는 불룩한 배가 위로 향하도록 사지를 벌린 뒤 금속빛 칼을 찔러 박는다. 날렵한 칼날이 목에서부터 항문까지 단숨에 긁고 지나간다. 숨이 끊어진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새빨간 피가 틈새기로 흘러나온다. 피비린내가 삽시간에 퍼진다.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은 재빨리 피를 수챗구멍으로 흘려보낸다. 틈새기로 내장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미끈미끈한 막에 둘러싸인 덩어리 두 개도 나온다. 새끼다. 뚜렷한 형체를 갖추고 있는, 조금은 따뜻한. 남자는 낯선 물체에 화들짝 놀라 동작을 멈춘다.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어미의 얼굴을 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남자는 끈적끈적한 손을 들여다본다. 아내보다 더 부드럽고 하얗던 손, 꽃대궁 하나 꺾지 못하던 손,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손. 그 손이 문득 제것이 아닌 양 낯설게 느껴진다. 남자는 큰 숨을 내쉬면서 부엌 창으로 고개를 돌린다. 무화과나무 이파리들의 움직임이 수상하고도 소란스럽다.

아내가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남자를 배려한 행동이지만 남자는 못마땅하다. 배려라고 다 고맙고 감사한 건 아니다. 아내의 배려는 사소한 부분에만 머물러 있기에 더욱 그렇다. 솔직히 저 정도의 배려는 배려라고도 할 수 없다. 아내는 남자가 요구하는 모든 걸 해 줘야 하는 입장이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하고 죄책감에 밤잠을 설쳐야 한다. 이마에 바늘 자국 몇 개 남은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아내는 그 흉터도 못 견디고 성형외과를 찾아갔다. 자신 때문에 남자가 치르고 있는 희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내는 피곤한지 들어오자마자 거실 소파에 눕는다. "아, 배고파. 밥 있어?" 보통 때 같으면 저녁까지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왔을 아내가 밥을 달라고 한다. 자신을 위한 특별 요리가 준비되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남자는 아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빨리 부엌으로 들어간다. 부엌 창문에 드리워진 손가락 모양의 무화과나뭇잎이 스산하게 너울거린다. 남자는 낮에 준비해둔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쟁반에 담는다. 손에는 의식적으로 일회용 비닐장갑을 낀다. 충분히 위생적이라는 걸 인식시켜야 한다. 근사한 포크와 나이프가 곁들어진 이국풍의 쇠고기크로켓이 소파 테이블에 놓인다. 아내의 눈이 비닐장갑 낀 남자의 손에 잠깐 머물다 접시로 옮겨진다.

부엌을 개조한 후 아내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다. 부엌은 이제 아내와 별 상관없는 공간, 낯선 공간이 되었다. 설거지를 하려면 자세를 낮추고 허리를 구부려야 하는 곳, 어둡고 답답하고 후텁지근해 불길한 느낌이 드는 곳, 한번씩 역겨운 냄새가 바람 불듯 훅 끼치는 곳. 부엌이 남자 차지가 된 데다 아내가 직장을 나간 후 집에서 식사할 일이 없어졌으니, 들어가지 않는 것보다 들어갈 일이 없어졌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부엌을 개조하겠다고 했을 때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함부로 손대면 조왕신이 노한다는데." 단지 그 한마디뿐이었다. 조왕신이 재앙을 내리든 그건 남자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받을 재앙도 없었고 받는다 해도 이젠 두려울 것도 없었다. 아내는 오히려 부엌이 남자 차지가 된 걸 은근히 반기는 눈치였다. 아내로서는 지긋지긋한 부엌에서 해방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생긴 터였다. 아내는 부엌과 단절된 후 남자가 어떻게 부엌살림을 꾸려나가는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똥 오줌 처리한 손이 불결해 보였는지 남자가 만든 요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부엌일을 해 본 소감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아내의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비쳤을 것이다. 아내에게 부엌일은 들여다보거나 묻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는, 뻔한 일이었다. 아내는 부엌일이 남자에게 하루하루를 견디게 해 줄 적당한 소일거리가 되어 주어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사람이 하릴없이 지내면 망상에 빠지거나 피폐해지기 십상이었다.

아내가 식사를 한다. 남자는 부엌에서 아내의 검은 머리를 바라본다. 어느새 숱 많은 머리칼은 꽤 많이 자라 어깨 언저리를 뒤덮고 있다. 남자도 예전에는 숱 많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무슨 남자가 숱이 이렇게 많아." 아내는 남자의 머리를 감겨 줄 때마다 쐐기를 박듯 말했다. 머리를 빡빡 문질러대는 아내의 손톱은 살 속으로 박힐 것처럼 날카로웠다. 남자는 어느 날 가위를 들고 거울 앞으로 가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잘라냈다. 전기 면도기는 남자의 두상을 말끔하게 정리해줬다. 짧은 머리를 고수했던 아내는 그 후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아내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식사만 한다. 어느 나라 요리인지, 어떤 고기를 썼는지, 독특한 향이 나는 소스는 어떻게 만든 건지 아내는 궁금하지 않다. 맛에 대한 품평을 내놓지도 않는다. 남자는 굳이 묻지 않는 걸 일부러 나서서 알려주고 싶지 않다. 말을 해봤자 거짓말밖에 더 하겠는가. 남자는 접시에 스치는 포크와 나이프 소리를 경청하며 요리책을 펼친다. 다음에 할 요리 세 가지를 미리 찢고 재료를 살핀다. 구입해야 할 목록을 종이에 꼼꼼하게 적어 아내에게 간다. 아내는 반으로 썬 크로켓을 한입에 넣고 종이를 받아든다. 아내의 목에 걸려 있는 핸드폰에 불이 들어온다. 아내는 식사를 중단하고 핸드폰을 받는다. 아내의 눈동자가 좌우로 부산하게 움직인다. "팀장님? 그 도면요? 알았어요.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아내는 전화를 끊고 아득하게만 보이는 나무 계단을 타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남자는 아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숫자를 센다. 계단 디딤판은 모두 열여섯 개다.

남자는 침대와 소파 사이로 난 틈으로 들어가 팔굽혀펴기를 한다. 둔부에 욕창이 생기는 걸 방지하려면 꾸준히 움직여줘야 한다. 규칙적인 식사와 다양한 영양 섭취로 살도 많이 쪘다. 이대로 방치해 두면 비만이 되기 십상이다. 뚱뚱한 몸은 남자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족쇄가 되고 말 것이다. 남자의 엄마는 포동포동 살이 오른 남자를 보고 흐뭇해 했다. 아내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이라며 아내의 손을 붙잡고 눈물까지 흘렸다. 남자는 오랜만에 웃는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아내는 야근 때문에 새벽에나 들어갈 것 같다고 말한다. 기타 줄처럼 아내의 목소리는 한껏 당겨져 있다. 손으로 조금만 건드려도 툭 끊어질 것만 같은 긴장감. 그 긴장감이 남자의 신경줄을 와락 잡아당긴다. 불현듯 어떤 줄이 더 팽팽한지 남자는 겨루고 싶어진다. 남자는 전화를 끊고 이층으로 연결된 나무 계단을 쏘아본다. 남자는 주먹을 꽉 쥐어 팔뚝에 힘을 모은다. 운동으로 다져놓은 팔뚝이 강철보다 더 단단해 보인다.

드디어 남자는 아득하기만 했던 계단에 엉덩이를 올려놓는다. 발바닥 대신 손바닥으로 계단을 짚고 팔을 곧추세운다. 상체가 팔을 따라 올라가면서 두 번째 계단으로 엉덩이를 올려놓는다. 절반도 올라가지 않았는데 온몸이 불에 덴 것마냥 화끈거린다. 얼굴은 온통 땀으로 스적거리고 입은 갈증으로 바싹 타들어 간다. 이층집으로 이사 온 후 계단을 밟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왜 하필 이층집이었을까. 아내가 이층집을 원했던 걸까. 둘이 살기에 이 집은 황량할 정도로 컸다.

사고 한 달 후 남자의 부모는 아내 명의로 이 집을 사주었다. 혹시라도 아내가 남자를 버릴까 염려되어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불쌍한 아들을 위해 그들은 매달 생활비까지 보조해주었다. 남자를 버리지 않는 한 아내는 돈 많은 시부모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나쁜 여자 혹은 이혼녀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아도 될 것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열녀라는 칭호까지 하사받게 될 것이다. 손가락질 받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아내가 마다할 리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자를 위해 아내가 운전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남자의 아빠는 차를 사주겠다고 했다. 운전에 소질이 없는 데다, 자동차에 대한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아내는 단번에 운전면허를 땄다. 남자의 아빠는 불행한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튼튼한 지프를 권했다. 남자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랫동안 못해본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운전실력이 서툴다는 이유로 계속 미뤄왔다. 한때 남자는 지프에 붙어 있는 '초보운전' 딱지가 사라지기를 학수고대했었다.

이층은 오롯이 아내를 위한 공간이다. 아내는 잠도 이층에서 잤고 작업도 샤워도 이층에서 했다. 남자의 똥오줌이 씻겨나가는 곳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는 이층에 방이 두 개가 있다고 했다. 방 하나는 침실로 쓰고 다른 방은 컴퓨터와 책을 진열해 작업실로 쓴다고 했다. 남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아내의 설명으로만 들어야 한다는 게 못마땅했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이다. 남자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엉덩이를 걸친다. 엉덩이가 놓이자마자 곧바로 몸을 무너뜨려 가쁜 숨을 몰아쉰다. 차가운 나무 바닥으로 땀방울이 떨어진다. 숨소리가 잦아들 때쯤 상체를 일으켜 손바닥으로 걷기 시작한다. 아래층과 달리 위층은 인테리어를 전혀 하지 않았다. 문은 모두 세 개다. 남자는 차례대로 문을 연다. 첫 번째는 화장실이고 두 번째는 침실이다. 침실에는 침대밖에 없다. 남자는 작업실로 쓰고 있다는 세 번째 방으로 들어간다. 벽면을 감싸듯 세워져 있는 책장과 큼지막한 책상이 보인다. 책상에는 남자가 쓰던 컴퓨터가 놓여 있다. 남자는 회전의자에 올라앉기 위해 버둥거린다. 바퀴가 달린 데다 몸체가 돌아가는 통에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다. 책상 앞에 놓여 있던 의자가 창가 쪽으로 밀려나서야 간신히 앉는 데 성공한다. 남자는 열에 들뜬 숨을 내쉬며 땀을 닦아낸다. 일단 의자에 앉으니 움직이기는 한결 쉬워진다. 바퀴는 남자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

남자는 벽을 짚으며 책장으로 간다. 책장에는 여행 관련 서적과 남자의 칼럼이 실린 잡지가 즐비하게 꽂혀 있다. 책 앞에 세워져 있는 액자 속에서 처녀 적 아내가 남자를 향해 웃는다. 아침 이슬에 젖은 꽃처럼 화사하고 푸른 미소. 입술을 일렁일 때마다 솔솔 풍기던 웃음향기. 그러나 아내가 품고 있던 그 꽃은 이제 지고 없다. 아내한테서는 알싸한 독풀 냄새만 난다.

액자 옆에는 말린 해면동물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 있다. 해면동물은 아내의 일본 친구가 결혼 선물로 준 것이다. 유리질의 뼛조각이 바구니처럼 그물져 있는 위강 속에는 암수 새우 한 쌍이 들어 있다. 해면동물과 편리공생관계인 새우는 유생시기에 그물 안으로 들어가 탈피를 한다. 탈피로 몸집이 커져버린 새우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평생을 함께 산 새우 부부는 죽어서도 한 무덤에 묻힌다. 비록 자유가 없는 철창 신세지만 누군가가 옆에 있기에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남자는 방향을 돌려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간다. 책상 유리에도 먼지가 옅게 내려앉아 있다. 컴퓨터 스피커 옆에 재떨이와 빈 와인병이 놓여 있다. 재떨이는 담배꽁초로 시커멓다. 뭐가 괴로워서 술.담배를 배운 걸까. 아내는 술.담배를 전혀 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결혼 초에 담배를 끊게 하기 위해 남자를 달달 볶아댔던 게 아내였다. 남자가 끊은 술.담배를 이젠 아내가 하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를 향해 질러져 있던 쇠 빗장이 조금 열리려고 한다.

남자는 책상 서랍을 열어본다. 예전에 남자가 썼던 잡동사니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잡동사니에 분홍색 알약 케이스 하나가 섞여 있다. 테두리를 따라 배열되어 있는 알약 위에 요일이 찍혀 있다. 남자는 초인종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알약 케이스를 떨어뜨린다. 누굴까. 아내일까. 아내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 남자는 서둘러 방에서 나온다.

소년은 땀을 뒤집어 쓴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남자를 안쓰러운 듯 쳐다본다. "어디 안 좋으세요?" 남자는 아니라는 듯 힘겹게 고개를 젓는다. "자요." 소년이 눈송이처럼 하얀 비둘기를 들이민다. 남자를 향해 비둘기의 까만 눈이 한번 깜빡인다. 살아 있다. "저희 학교에 가면 비둘기 천지예요. 여동생이 데려 온 거예요. 애들이 돌을 던지고 물을 뿌려도 수돗가에 앉아서 꼼짝하지 않더래요. 이런 걸 데려 오다니, 멍청한 계집애. 엄마가 갖다 버리래요." 남자가 선뜻 받아들지 않자 소년은 거실 바닥에 비둘기를 내려놓는다. "제가 잡은 게 아니니까 공짜로 해드릴게요." 선심 쓰는 듯한 말에도 남자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년은 남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다. "아저씨!" 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년을 쳐다본다. 개구리. 소년의 얼굴을 보자 개구리가 퍼뜩 떠오른다. 고양이보다 더 혐오하는 것이면서 소년이 쉽게 잡을 수 있는 것, 개구리. "개구리를 잡아와라." "개구리야 비둘기만큼이나 널렸죠. 잡기도 쉽고. 재빨라서 고양이는 무지 힘들었거든요. 마리당 쳐주셔야 돼요." 탐욕스러운 소년은 끝까지 흥정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소년은 현관을 나가려다 허전한 듯 다시 돌아선다. "오늘은 왜 먹을 거 안 줘요?" "남은 게 없다. 내일 와라." "에이, 배 고픈데…."

소년이 간 뒤 남자는 부엌으로 가 요리책을 뒤진다. 꿩깐풍기. 거실에 죽은 듯이 앉아 있는 비둘기가 구구구 울어댄다.

캐주얼 차림의 아내가 배낭을 메고 이층에서 내려온다. 아내는 오늘 회사 사람들과 등산을 가기로 했다. 아내는 신발장을 활짝 열어놓고 신발을 고른다. 아내가 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남자의 등산화다. 여행 다닐 때마다 남자가 신고 다녔던 빨간색 가죽 등산화. 자글자글 잡혀 있는 가죽주름 사이로 시커먼 때가 끼어 있어 볼품 없다. 그러나 발을 집어넣는 순간 푹신한 풀밭을 밟고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힐 것이다. 남자는 두 발을 포근하게 감싸주던 신발의 감촉을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발회목과 뒤꿈치를 지나 발허리를 거쳐 발가락 끝까지 닿던 촉촉하고 부드러운 푹신함. 아내가 등산화를 신고 몇 발짝 떼어본다. 겉보기와 달리 만족스러운지 아내는 허리를 구부려 끈을 묶는다. 아내의 가슴께에서 핸드폰 램프가 깜빡인다. "벌써 도착하셨어요? 지금 나가요. 박 대리하고 서영씨는 같은 동네니까 가는 길에 태우면 되겠네요." 아내는 급한 듯 신발장 문도 닫지 않고 나간다. 신이 난 아내의 엉덩잇바람이 남자의 얼굴을 서늘하게 할퀸다.

남자는 신발장을 들여다본다. 아내의 신발이 선반 세 칸을 빼곡이 차지하고 있다. 자리가 부족해서 층으로 포개놓은 것도 있다. 아내가 등산화를 신고 가버렸으니 남자의 신은 이제 구석에 구겨져 있는 스니커즈뿐이다. 그 많던 신발은 어디로 간 걸까. 남자는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신발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무의미한 신들, 그러니 없어져도 상관없는 신들. 장식품처럼 발에 걸치기만 하면 되니 저 스니커즈 하나면 평생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고무밑창이 닳을 일도 겉천이 너덜너덜해질 일도 없을 것이다. 많아봤자 아내의 신발이 놓일 자리만 차지하는 꼴이 된다.

이로써 아내는 남자에게서 등산화까지 뺏어갔다. 아내는 인테리어 공사현장 사진이 필요하다며 남자의 디지털카메라를 가져갔다. 도면을 작성한다며 컴퓨터를 가져갔고, 작성된 도면을 늘 휴대해야 한다며 노트북을 가져갔다. 가까운 곳으로 산책을 나갈 때는 산악용 자전거를 타고 갔고 롤러브레이드를 들고 정기적으로 동호회에 나갔다. 아내는 남녀 구분이 없는 옷가지와 모자도 가져갔고 운전용 선글라스도 가져갔다. 가질 수만 있다면 쓸모 없어진 남자의 다리도 가져갈 것처럼 아내는 모두 가져갔다. 힘 한번 못 쓰고 모든 걸 빼앗겨버린 남자는 어느 날 부평초처럼 집안을 떠돌아다녔다. 아내가 가져갔으니 남자도 그만큼 가져와야 했다. 아내에게 소용없어진 것, 아내의 시선이 머무르지 않는 것, 아내에게 무참히 버려짐으로써 버림받은 것.

부엌!

남자는 불을 켜고 부엌문을 열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악취와 쉬지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부엌 전체가 푸른곰팡이로 뒤덮인 것처럼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의 발길이 끊어진 부엌은 메마른 사막의 모래와 나무를 연상시켰다. 바람이 창문과 무화과나무를 뒤흔들 때마다 나무 그림자가 부엌을 더욱 음음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그때서야 문득 떠올렸다. 절망 속에서도 때가 되면 배가 고파왔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불도 켜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왔고,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음식을 집어먹으며 황홀경에 빠졌던 자신의 모습을. 삶의 유일한 낙. 살아 있음에, 살 수 있음에 가장 원초적으로 작용하는 식욕. 거짓말도 배반도 할 줄 모르는 그것. 또 다른 흥분과 감각의 세계. 숨어 있던 감각을 발견한 순간 미칠 듯 식욕이 일기 시작했다. 남자는 무섭고도 위대한 식욕을 지배하고 싶어졌다. 남자는 칼을 불끈 잡아들고 메마른 부엌을 둘러봤다. 요리는 손으로 하는 것이었다. 남자의 인생이 새로운 시험대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 또 다른 인생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아내가 나간 걸 확인한 남자는 계단을 오른다. 그새 팔뚝은 더욱 단단해졌다. 남자는 회전의자에 앉아 책상 서랍을 다시 열어본다. 일전에 봤던 알약 케이스는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서랍을 닫고 컴퓨터를 켠다. 손에 안기는 마우스의 감촉이 낯설다. 남자는 마우스로 컴퓨터에 내장된 모든 프로그램들을 클릭한다. 남자가 전에 저장해 놓았던 각종 문서들과 사진들이 고스란히 마우스에 끌려나온다. 그러나 구석구석 뒤져봐도 도면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아내는 아래층 인테리어를 맡았던 회사에 취직했다고 했다. 아는 언니가 그 회사 디자이너로 있다고 했다. 인테리어라는 직업이 그렇듯 밤샘 작업이 많아 아내는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남자는 노트북 전원을 켜고 프로그램을 클릭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도면 같은 것은 없다. 남자는 책상과 컴퓨터 키보드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댄다. 책상 유리와 키보드에 솜털 같은 먼지가 쌓여 있다. 남자는 팀장과 박 대리, 서영이 누군지 궁금해진다.

베트남 스프링롤. 끓는 물에 라이스 페이퍼를 데쳐 새우와 야채를 넣은 말이. 재료. 라이스 페이퍼 10장, 새우 5마리, 당근 반개, 피망 1개, 양상추 5장, 팽이버섯 1봉지. 소스 재료. 해선장 1큰술, 땅콩버터 반큰술, 탄산수 2큰술, 설탕 작은술, 다진 마늘 작은술, 소금 약간. 만드는 법. 1. 새우를 소금물로 씻은 후 등쪽 내장을 제거한다. 찜통에 찐 다음 껍질을 벗기고 반으로 포를 뜬다. 2. 양상추, 당근, 피망을 가늘게 채 썬다. 3. 팽이버섯은 밑동을 자르고 가닥가닥 뗀다. 4. 해선장에 재료를 넣어 소스를 만든다. 5. 라이스 페이퍼는 뜨거운 물에 살짝 담갔다 꺼내어 준비해 놓은 새우와 야채를 넣고 둥글게 감싼다. 6. 속 재료가 보이도록 한쪽을 오픈시켜 소스와 함께 그릇에 담는다.

요리는 세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불과 재료만 있다고 요리가 되는 건 아니다.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방법이 주어져도 맛은 천태만상이다. 그것은 재료를 어느 시점에서 배합하느냐에 따라, 물의 끓는 정도에 따라, 불의 강약 등에 따라 달라진다. 즉, 맛의 결정은 재료를 다루는 타이밍과 손끝의 정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최고 요리사의 조건이다. 같은 재료와 방법으로 최상의 맛을 내는 비법. 어떤 요리책도 그걸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오직 끊임없는 실습과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남자는 지금 그 과정을 밟고 있다. 맛만 봐도 무슨 재료가 들어갔는지 알 수 있을 때까지 그 과정은 수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요리를 다 끝내고 시식을 하려는데 뒤에서 구구구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식탁을 본다. 비둘기는 일주일 내내 법당의 부처처럼 식탁 위에서만 지냈다. 손가락으로 건드려도 꼼짝하지 않았다. 한번씩 깜빡이는 눈을 보고서야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마저 깜빡이지 않았다면 박제된 새로 오인할 정도였다. 그러다 배고플 때만 잠깐 구구구 소리를 냈다. 녀석은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는 것으로 부러진 날개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소년은 늘 남자가 요구한 것의 숨을 완전히 끊어놓은 상태에서 가져왔었다.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것은 비둘기가 처음이었다. 솔직히 비둘기는 남자가 요구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남자는 칼을 박을 수 없었다. 낯익은 비둘기의 눈동자는 칼을 쥔 남자의 손목을 단숨에 꺾어버렸다.

초인종이 울린다. 남자는 비둘기 앞에 하얀 새우살을 던져주고 거실로 나간다. 소년이다. 남자는 소년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를 본다. 비닐봉지는 바스락거리지 않는다. 소년은 이번에도 완전히 숨을 끊어놓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소년이 봉지를 건네주며 묻는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저한테 사간 걸로 뭘 하세요?" 거래의 원칙과 묵계를 깨고 소년이 처음으로 묻는다. 어린 호기심에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실험." 남자는 짧게 대답한다. "실험이면 해부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소년은 더욱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는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소년에게 묻는다. "톱질할 줄 아니?" "톱질이요? 한번도 안 해봤지만 하는 건 많이 봤어요." "나무를 베어주겠니?" 남자는 손가락으로 부엌 쪽을 가리킨다. "어, 저 나무는 멀쩡한데. 베어야 할 건 저것들 아니에요?" 소년이 말하는 건 대문으로 가는 길에 심어져 있는 무화과나무다. 소년이 가리킨 나무의 둥치들은 늙은 여자의 손등처럼 바싹 말라 있고 잎은 흑갈색으로 타들어가고 있다. 이상하게도 부엌 쪽 무화과나무만은 윤기가 흐르고 잎은 무성하고 청청했다. "굳이 베어내지 않아도 병든 건 저절로 죽게 돼 있어." "얼마 주실 건데요?" 남자는 손가락 다섯 개를 꼽아 올린다. "지금 당장 베어라. 톱은 장독대 옆 창고에 있다."

남자는 부엌에서 창문을 바라본다. 남자의 무릎 위에는 베트남 스프링롤이 놓여 있다. 쓱쓱, 서툰 톱질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음악을 듣듯 눈을 감고 스프링롤을 소스에 찍어 입에 넣는다. 이빨이 얇고 부드러운 라이스 페이퍼를 찢고 새우와 야채를 베어 문다. 싱싱하고 상큼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소년의 톱질이 탄력을 받을수록 남자의 먹는 속도도 빨라진다. 접시가 깨끗하게 비어갈 즈음 남자는 스르르 눈을 뜬다. 그 순간, 무화과나무가 남자의 눈앞에서 힘없이 쓰러진다. 무수히 많은 햇살들이 붉은 혓바닥을 놀려 부엌을 샅샅이 훑는다. 부엌에 도사리고 있던 먹빛 어둠이 순식간에 지워진다.

로메인 상추 닭살샐러드. 야채 위에 닭다리살과 토마토 드레싱을 얹어 먹는 샐러드. 재료. 로메인 상추 15잎, 치커리 20g, 알파파 3큰술, 레디시 3개, 닭다리살 200g, 생강즙, 소금, 후춧가루. 토마토 드레싱 재료. 토마토 1개, 와인, 식초, 올리브 오일 각 1큰술, 설탕, 소금. 만드는 법. 1. 로메인 상추와 치커리, 알파파를 찬물에 씻어 싱싱한 상태를 유지한다. 2. 레디시를 얇게 썬다. 3. 닭다리살은 생강즙, 소금, 후춧가루로 밑간을 한 뒤 찜통에 찐다. 4. 토마토는 껍질을 벗겨 잘게 다진 후 드레싱을 만든다. 5. 로메인 상추를 놓고 그 위에 치커리와 닭다리살, 레디시, 알파파를 얹는다. 6. 토마토 드레싱은 차게 보관한 뒤 먹기 전에 끼얹는다.

남자는 개구리의 하얀 배를 가른다. 남자는 문득 중학교 시절 생물시간을 떠올린다. 교과서에 실려 있던 개구리 해부도가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사방으로 당겨져 핀으로 고정되어 있는 뱃가죽, 한치의 빈틈도 없이 뱃속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내장들, 각 장기와 기관들에 날카로운 화살을 박아 명칭을 달아 놓았던 해부도. 해부도의 사실성을 증명하고자 담당교사는 학생들에게 다음 시간까지 개구리를 잡아오라고 했다. 해부는 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실험실에서 행해졌다. 남자는 징그러워 살갗조차 만지지 못했고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고 담당 교사의 목소리는 높아져 갔다. "겁쟁이들!" 그때 조원 중 한 명이 아이들을 밀치고 나와 개구리 사지를 핀으로 고정하고 배를 갈랐다. 순간 남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배를 가른 놈이 남자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숨을 끊어 놓지 않아 배를 가른 뒤에도 개구리는 사지를 꿈틀거렸다. 내장들은 심장과 더불어 박동질을 쳤다. 조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뱃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해부도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고정된 핀을 뽑고 개구리가 벌떡 일어났다. 조원들은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개구리는 그 틈에 실험대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배가 갈린 줄도 모르고 개구리는 처절하게 어딘가로 뛰어갔다.

남자는 머리와 내장을 제거하고 껍질을 한번에 쓱 벗긴다. 그러자 부드럽고 번들거리는 연분홍빛 피부가 드러난다. 개구리 뒷다리는 통통하면서도 야들야들하다. 남자는 칼로 다리를 미세하게 토막친다. 형체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누군가 개구리는 닭고기와 맛이 똑같다고 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내다. 남자는 도마 위에 늘어져 있는 개구리를 봉지에 쓸어 담는다. 덩어리 한 개가 손아귀에서 빠져나온다. 마지막 한 개를 담으려는 찰나에 아내가 부엌문을 연다. 부엌과는 격을 두고 사는 사람이 오늘은 웬일일까. 혹 눈치라도 챈 걸까. 다행히 아내의 손에 커다란 봉지가 들려 있다. 남자가 종이에 적어준 재료들을 사온 모양이다. 아내는 부엌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고 봉지를 문 옆에 내려놓는다. 아내의 커다란 눈만이 경계선을 넘어 도마 위로 꽂힌다. "그, 그게 뭐야?" 아내는 제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듯 의심으로 부풀려 있던 눈을 가늘게 만든다. "개구리." 남자는 짐짓 느긋하면서도 담담하게 말한다. "개구리가 왜 도마에 있냐구! 이제 정신까지 어떻게 된 거야?" 소름이 돋는지 아내는 손으로 한쪽 팔뚝을 연신 쓸어 내린다. 남자는 식탁 위에 있는 비둘기를 턱짓으로 가리킨다. "비둘기 밥." 아내는 저건 또 뭐냐는 듯 마뜩찮은 표정으로 비둘기를 쏘아본다. "부엌에서 키울 게 따로 있고, 할 게 따로 있지!" "내가 여기 말고 어디서 이걸 할 수 있겠어?" 이 말이라면 아내도 더는 대꾸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의 오금박는 말에 아내는 예상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아내는 눈동자를 심하게 굴리더니 남자의 기를 꺾을 만한 게 생각난 듯 사나운 어투로 묻는다. "멀쩡한 나무는 왜 벤 거야?" 남자는 대답이 없다. 부엌에 들어오지 않는 아내가 그 이유를 알 리 없다. 아내는 부엌문을 세게 닫고 가버린다.

아내가 다시 부엌문을 열 일은 없을 것이다. 남자는 어느 때보다 더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요리를 시작한다. 너무 맛있어서 아내가 조용한 비명을 지르게 할 것이다. 남자의 손에 대한 불결함을 잊고 맛을 탐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남자는 개구리 손질을 마저 끝내고 일부는 찜통에 쪄낸다. 마지막으로 토마토 드레싱을 만든다.

아내가 이층에서 내려와 티브이 켜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준비된 싱싱한 재료에 토마토 드레싱을 듬뿍 얹어 나간다. 비닐장갑 낀 손으로 테이블 위에 샐러드를 놓는다. 아내는 시답지 않은 듯 눈을 내리깔다 티브이로 시선을 옮긴다. 아까 본 것 때문에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럴 때는 조금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자세를 낮춰야 한다. "맛이 어떤지 좀 봐줘. 부탁이야." 남자가 아내에게 맛을 봐달라고 요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안 들어주고는 못 배길 것이다. 아내는 마지못해 포크를 들고 뒤적거리다 야채를 찍어 먹는다. 야채 사이에는 잘 익은 고기도 있을 것이고 설익은 고기도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맛이 맘에 드는지 다행히 아내는 포크를 놓지 않는다. 설익은 고기는 너무도 미세해서 감히 아내의 혀와 이빨은 감지해내지 못할 것이다. 야채에 묻어 아내의 몸 속으로 들어간 설익은 고기는 기생충 감염을 일으킬 것이다. 기생충은 온몸의 장기를 헤집고 돌아다니다 뇌로 이동할 것이다. 설사와 구토증상이 있을 것이고, 증세가 심해지면 경련이 일다가 사지까지 마비될 수도 있다. 남자는 얼마 전에 읽은 신문 기사 한 토막을 되새긴다.

남자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다. 남자의 귀는 이층을 향해 한껏 열려 있다. 이층에서는 부산하게 문을 여닫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불편한 몸을 힘겹게 이리저리 뒤척인다.

아내가 나간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무화과나무를 지나, 대문을 열고, 아내가 나간다. 모지락스럽게 대문을 닫아걸고 돌아선 아내는 지프를 타지 않고 그냥 나간다. 대문 앞에 주차된 지프 뒷유리에는 아직도 '초보운전' 딱지가 붙어 있다.

남자는 불을 켜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요리책을 펴 책장을 찢는다. 오늘 할 요리는 달콤한 단호박조림이다. 냉장고에서 단호박을 꺼내 껍질을 벗기고 씨를 제거한다. 남자는 호박을 썰며 지금까지 한 요리 중,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가 뭔지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고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를 고르게 되면 최고의 맛을 낼 수 있을 때까지 그 요리에만 집중할 참이다. 그래서 한 가지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을 낼 것이다. 꼭 음식점이 아니어도 좋다. 아주 조그마한 음식점 요리사가 되어도 상관없다. 아니, 요리사가 아니어도 좋다. 전직을 살려 요리비평가나 요리칼럼니스트가 되어도 좋다. 그때 즈음이면 모든 것에 무던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요리에는 닫힌 마음과 갇힌 마음을 열 수 있게 하는 힘이 숨어 있다.

뒤에서 푸드덕하는 소리가 들린다. 비둘기의 날갯죽지가 조금 들썩인다. 비둘기는 날개를 점점 부풀리더니 부엌 창턱으로 날아가 앉는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다가간다. 비둘기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살피더니 창틀에서 훌쩍 뛰어내려 무화과나무 등걸에 앉는다. 그러고는 이내 날개를 활짝 펴 후르르 날아간다. 등걸에 깃털 한 개를 남겨 놓고 가볍게 날아간다. 남자는 비둘기가 날아간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차례 시원하게 비를 뿌릴 것처럼 날씨가 끄무레하다. 오늘 아내는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의 고운 머리가 비에 젖는 걸 남자는 원치 않는다. 남자는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떠올린다.

남자는, 아내를 사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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