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캠리와 아이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그러다 보니 봉은 소비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됐다. 누구는 왕 대접 받는데 나만 봉 취급 받았다면 더 기분 나쁘다. 한술 더 떠 왕 대접받은 게 스미스 부인이나 왕서방 부인이라면 화까지 날 만하다. 그럴 때 밖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나면 소비자들은 쉽게 그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지난달과 이달 차례로 이 땅에 선보인 캠리와 아이폰 열풍이 그랬다. 캠리는 출시 한 달 만에 5500대가 팔려 지금 주문하면 내년 상반기에나 받을 수 있다. 아이폰도 열흘 만에 10만 대 넘게 팔렸다. 애초 예상 20만 대 판매는 물론 50만 대도 뛰어넘을 기세다. 이런 예상 밖 인기의 이면에는 “더 이상 (국내 업체의) 봉 노릇 않겠다”는 소비자들의 반발 심리가 깔려 있다.

국산차는 그럴 만했다. 몇년 전 미국에 가는 한국 유학생과 주재원에겐 일제 중고차를 사는 게 유행이었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워낙 인기라 산 값보다 비싸게 팔리기도 했다. 1년 뒤면 10~20%씩 값이 떨어지는 다른 나라 차와 비교가 안 됐다. 그럼에도 ‘신토불이’를 외치며 국산차를 사 귀국길에 가져온 이들이 꽤 됐다. 그런데 미국에선 쌩쌩 돌아가던 이 회사의 10년, 10만 마일 무상 수리 보장 프로그램이 한국에선 멈췄다. 3년, 6만㎞까지만 무상 수리가 됐다. 미국에서 사온 차라고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한국에 오면 한국식 보장 프로그램에 따라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뿐 아니다. 현대차는 지난해 초 제네시스를 내놓았다. 국내외에서 ‘명품이 탄생했다’며 감탄했다. 그런데 미국 판매 가격이 문제가 됐다. 유난히 쌌다. 국내 값과 1000만원 이상 차이가 났다. 화가 난 소비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일부 네티즌은 미국에서 제네시스를 들여와 한국에서 굴리는 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올해는 어땠을까. 현대차는 올해 미국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실직하면 차를 되사주는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미국 언론들은 ‘소비자의 마음까지 배려한 감성 마케팅’이라며 극찬했다. 기름값도 지원해 줬다. 그러나 미국뿐이었다. 한국에선 되레 신차를 내놨다며 차 값을 올렸다. 올 상반기 현대차는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렸다. 연말 실적도 사상 최고로 예상된다. 한 애널리스트는 “올 예상 영업이익 2조8000억원 중 약 80%인 2조원이 국내에서 올린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 시장에서는 본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휴대전화와 이동통신도 비슷하다. 무선인터넷(WIFI)이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등의 기능을 빼고 팔지만 가격은 국내가 더 비싸기 일쑤다. 통신요금제에 끼워 파는 휴대전화는 외국에서와 달리 구 모델에 집중된다. 최신 휴대전화는 보조금 혜택을 받고도 몇십만원을 더 얹어줘야 한다. 초고속인터넷 강국이라면서 무선인터넷 요금은 비싸기 짝이 없다.

‘아이폰 효과’는 벌써 그런 풍경을 바꾸고 있다. 국내 스마트폰 가격은 절반 밑으로 뚝 떨어졌다. 아이폰에 맞서 휴대전화 업체와 이동통신사가 스마트폰에 보조금을 몰아줬기 때문이다. 이동통신사들은 꿈쩍 않던 무선 인터넷 요금을 줄줄이 내리고 있다.

‘캠리 효과’도 작동 중이다. 당장 혼다 등 일본 수입차들이 가격을 내렸다. 업계 관계자는 “도요타가 출혈경쟁에 나섰다”며 “현대차의 수익 원천인 안방을 공략하자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국산차도 더 이상 쉽게 가격을 올리기 어려워졌다. 그만큼 소비자의 선택과 권리가 커졌다. 오랜 봉 노릇에서 벗어나 다시 왕이 될 희망도 생긴 셈이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