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밀사 평양밀사] 8·끝. YS '김일성 상봉' 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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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각하, 보고받으셨습니까. 김일성(金日成)주석이 사망했답니다!"

1994년 7월 9일 낮 12시 8분쯤. 박관용(朴寬用)대통령 비서실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김영삼(金泳三)대통령에게 金주석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그는 정상회담이 16일 앞으로 바짝 다가온 가운데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에서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 를 하던 중 김덕(金悳)안기부장에게 소식을 전해듣고 황급히 청와대로 달려온 참이었다.

金대통령은 이미 보고를 받은 듯 청와대 1층 식당 옆 별관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분단 50년만의 첫 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金주석이 갑작스레 사망한 게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金주석의 사망 시간은 7월 8일 오전 2시. 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그는 묘향산 특별초대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안기부가 金주석 사망을 접한 것은 그로부터 34시간 뒤, 북측의 공식 발표를 통해서였다.

발표 시각에 金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여성단체장들과 오찬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金전대통령이 전하는 당시 상황.

"식사를 시작한 지 3분 정도 됐을 거예요. 김석우(金錫友)의전수석이 저에게 쪽지를 전해줍디다. '12시 평양방송에서 金주석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라고 적혀 있더라구요. 그와 만나 민족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는데 무척 아쉬웠어요. 그 자리에 있던 분들에게 즉시 이 사실을 알렸지요. "

그 직후 박관용 일행이 상기된 표정으로 청와대로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는 즉시 "각하,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고 건의했다. 당황한 나머지 전군(全軍)에 내릴 '비상경계' 조치를 비상계엄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金대통령은 곁에 있던 이병태(李炳台)국방부장관에게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라" 고 지시했다.

당시 정부는 金주석 사망에 대해 "정상회담이 무산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고 발표했다.

일부 야당의원들은 "조문이 필요하다" 고 주장하고 심지어 전남대에선 분향소를 차리기도 해 물의를 빚었다.

보수 일각에선 "6.25 전범 추모에 경악과 우려를 감추지 못한다" 며 거세게 반발했다. 조문 파동이 거세지자 이영덕(李榮德)국무총리는 7월 18일 "김일성은 민족분단의 고착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비롯한 불행한 사건들의 책임자라는 역사적 평가가 이미 내려져 있다" 는 정부 입장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金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은 회담 준비에 여념이 없던 정부 관계자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6월 28일 회담 날짜.장소가 합의되면서 정부 업무가 정상회담으로 집중됐기 때문이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金대통령도 다른 일은 거의 제쳐두고 비서실에서 올린 '회담 시나리오' 를 익히는 데 몰두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첫 대면에서 金주석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면서 친근감을 표시하고 표정은 어떻게 지으며 어떤 인사말을 할지 등을 연습했다는 것이다. 북한 전문가들을 비롯해 각계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의견을 경청하기도 했다.

비서진이 가장 신경쓴 것은 金대통령이 '담판의 명수' 답게 협상을 이끌면서도 실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정종욱(鄭鍾旭)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수석의 말.

"나는 대통령께 '정상회담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중요하니 사전에 비서진이 토론을 거쳐 작성한 건의서를 잘 참고하시라' 고 말씀드렸어요. 7.4공동성명에서도 '자주' 라는 말 때문에 얼마나 말이 많았습니까. 이런 점을 예로 들며 환기시켰습니다. "

정상회담을 앞두고 관심을 모은 것은 의제 문제. 이홍구(李洪九)통일부총리-김용순(金容淳)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이 이뤄낸 실무절차 합의서에 의제에 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金대통령은 지난 4월 당시를 회상하며 "핵 비보유 원칙 합의, 전쟁 예방을 위한 金주석과의 핫라인 설치, 1천만 이산가족의 자유로운 편지 왕래 및 상봉 등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고 밝힌 바 있다.

준비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논란거리는 손명순(孫命順)여사의 동행 여부였다. 박관용 당시 비서실장(현 한나라당 의원)의 증언.

"통일부총리.안기부장 등과 이 문제를 검토한 끝에 안 모시고 가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어요. 분단 50년 만에 적진으로 들어가는데 비장한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동.서독이 첫 정상회담을 할 때도 부인을 동행하지 않았거든요. 김일성이 공식행사에 부인을 대동하지 않는 점도 고려했지요. "

그러나 모든 준비는 金주석 사망으로 한낱 시나리오에 그치고 말았다. 북측은 7월 11일 김용순 명의로 회담 연기를 통보해왔다.

이로부터 남북 정상이 첫 만남을 갖기까지는 무려 6년 세월이 걸렸다. 한반도의 새 천년 첫 여름을 뜨겁게 달굴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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