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3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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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34.탑골의 귀빈

머잖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한 시민의 입장에서는 그 일이 잘되어 남과 북이 서로 화평하게 사는 일에 큰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통일과 관련된 일을 매스컴을 통해 알게될 때마다 떠오르는 분이 있다. 늦봄 문익환 선생님이다.

민족의 통일이라는 문제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큰 열망을 지니시고 또 그런 일에 참으로 몸을 던져 애쓰신 분. 이런 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어쭙잖은 헌사겠지만 그분은 가까이서 뵐 때나 멀리서 뵐 때나 참으로 따뜻하고 큰 산 같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탑골에는 돌아가시기 전 딱 한번 오셨지만 탑골에 들르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었고 또 방북한 일로 감옥에 계시는 동안 구속 문인 돕기 일일주점 등을 통해 조그만 힘을 보탠 일도 있어서 매우 많이 오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하기사 그분이 직접 탑골에 오시고 안 오신 것이 무엇이 중요하랴. 이미 우리 모두에게 큰 어른이자 숨결인 것을. 하지만 탑골에 오신 그날의 일을 잊을 수 없다.

출옥 후 여의도에서 무슨 행사 후에 많은 분들과 함께 오셨는데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털실로 짠 목도리를 두르고 계셨다.

술은 한 모금도 안드셨는데 일행과 아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내 손을 덥석 잡으시고 찬찬히 말씀 하셨다.

"한선생 나 탑골 얘기 많이 들었어. 꼭 고향에 두고 온 누이같이 생겼구만. 여기 짓궂은 사람들 많이 오지? 다 괜찮아. 그러잖아도 내 언제 시간을 내서 꼭 한번 찾아오고 싶었는데 시간에 쫓겨 이제사 왔구만. "

나로서는 분에 넘치는 말씀이었다. 더구나 손으로 전해지는 그 느낌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마치 어떤 정기가 마음으로 전해지는 느낌이었는데 마음 속의 병들이 치유되는 것만 같았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진담이라고//(중략)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동무라고 부르면서 열살 스무살 때로/돌아가는 거지"

선생님의 '두 하늘 한 하늘' 이란 시집의 맨 처음에 실린 '잠꼬대 아닌 잠꼬대' 라는 시의 앞부분인데 그 말 그대로 당신이 그 엄혹한 시절 방북 하시고 정겹게 그 누군가를 끌어안는 모습을 생각하면 참으로 큰 분을 내 인생에서 만난 적이 있구나라는 느낌이 든다.

그 시의 뒷부분에 "역사를 산다는 것은 훈장이나 타는 일이 아니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는 일이며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 이라는 말은 지금 들어도 신이 난다.

그리고 그 다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면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걸어서라도 가겠다" 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선 눈물이 난다.

우리는 그 때 참으로 머리가 말짱한 바보들은 아니었는지. 그 시를 쓰고 꼭 그대로 살아내심으로써 그분의 삶 자체가 시가, 아니 역사가 됐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그분이 성큼성큼 걸어오셔서 '복희야 잘 사느냐' 고 물을 것만 같은데 이것은 착각일까? 초여름인데도 나는 눈 덮인 야산 사이에 선명하게 찍혀 백두대간으로 이어진 어여쁜 발자국 하나 가슴에 안는다.

한복희 <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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