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현대에 4,000억 긴급 수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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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 및 채권 금융기관들의 현대그룹 해법은 충분한 자금 지원으로 건설 등 일부 계열사의 자금난은 넘겨주되 강도 높은 자구노력과 지배구조 개선을 이끌어낸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특히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이 실질적으로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고, 2003년까지로 잡은 계열 분리 시한을 연내로 앞당기도록 요구한 배경에는 현대를 통해 재벌 개혁의 '모범답안' 을 만들어내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와 관련, 이헌재(李憲宰)재정경제부장관과 이용근(李容根)금융감독위원장.이기호(李起浩)청와대 경제수석은 25일 밤 회동을 하고 현대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임에선 현대건설 등이 일시적인 유동성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따라서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현대건설로 인해 금융.경제 전반에 큰 파장을 미칠 최악의 상황을 초래해선 안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건설과 상선이 외환은행으로부터 긴급자금을 수혈받아야 할 처지로까지 몰린 것은 안팎의 악재가 겹쳤기 때문이다.

우선 내부적으론 '왕자의 난' 으로 불리는 형제간 경영권 분쟁으로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현대투자신탁의 부실 문제가 불거졌지만 현대측이 내놓은 대책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는 게 증권가의 평가다.

현대측이 25일 鄭명예회장의 지분정리 방안을 내놓았지만 정부나 시장이 기대해온 자구노력이 미흡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투신 구조조정 문제가 부각되면서 투신의 공사채형 수익증권에 들어와 있던 돈이 계속 빠져나가 투신이 기업어음(CP).회사채 수요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도 현대건설의 자금난을 부채질했다.

CP나 회사채의 최대 수요처인 투신이 차환발행을 못해주게 되다 보니 업종의 특성상 외상 매출이 많은 현대건설이 자금난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일단 외환은행 등 거래 금융기관들의 자금지원으로 현대가 급한 불은 끄게 됐지만 불씨가 완전히 꺼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금융계에서는 현대의 지배구조 개편이나 구조조정 계획은 중장기적인 대책일 뿐 당장 발등에 떨어진 현대건설 등의 자금난을 해소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무엇보다 투신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문제다. 이달 말 고비를 넘겨도 투신이 계속 만기가 돌아오는 현대의 CP나 회사채를 연장해주지 못한다면 어려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투신 부실을 과감하게 정리해 투신이 시장안정 기능을 할 수 있게 하는 게 시급하다고 시장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현대가 정부와 채권단의 요구를 언제까지, 어떤 형태로 실행할 것인지도 관심거리다. 우선 鄭명예회장의 퇴진 문제. 정부와 채권단은 鄭명예회장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언제든 형제간 재산권 다툼이 재발할 수 있으며,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도 당국의 이같은 압박을 감안, 26일 鄭명예회장이 건설.중공업 등 3개 계열사 이사직을 내놓기로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실질적인 퇴진' 에 못미친다는 것이 당국의 반응이다.

현대가 이런 지배구조 개선작업과 함께 알짜 계열사 처분 등 자구노력을 강도높게 이행하지 못한다면 시장의 불신을 해소할 수 없고, 따라서 현대의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26일의 주가 폭락은 현대에 대한 시장의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병관.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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