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우리는 무얼 믿고 사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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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불편한 진실’의 주인공 앨 고어는 무안했는지 북극의 해빙을 들먹였고, 어느 신문은 호주로 진격하는 거대한 빙산의 항공사진을 들이댔다. 그러는 사이 이라크전쟁이 필수적임을 강조한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입지가 애매한 가운데 노벨상 축하연이 치러졌다.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가 조금 진정되자 월스트리트의 큰손 금융들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전문가들은 위기 진정론과 재발론으로 갈라졌다.

여당과 야당의 이전투구로 2009년을 시작한 한국은 끝장을 보지 못해 씨근거리는 정쟁 속에서 한 해를 마감해야 했다. ‘미디어 악법’을 내세워 벽두 기선을 제압했던 민주당은 힘겨운 싸움을 지속했다. 법안처리율이 역대 최저로 떨어졌다.

2009년 한국은 ‘4대 강’과 ‘세종시’ 시비로 세월을 다 보내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이런 형국이라면 내년에도 확실한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대통령은 홀로 분주했다. 두어 달에 한 번꼴로 전용기를 타야 했는데, 국격이 높아진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한시름 놓는 기업인들도 있었지만 자영업자들, 택시기사, 봉급생활자들은 여전히 불평을 털어놓았다. 선진국이 될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을 듯한 미심쩍은 시간들이었다.

2009년 겨울, 한국의 사회심리와 불안감은 반세기 전 김승옥이 『1964년 겨울』에서 포착한 형상과 닮은꼴이다. 서울의 외양이 완전히 바뀌고, 세계가 극찬하는 성장을 일궜어도 시민들의 미래는 몰려다니는 밤의 안개처럼 희미하고 사회는 명멸하는 네온사인처럼 초조하다. 밤의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조우한 소설의 두 주인공 김씨와 안씨처럼 말이다. 그들은 자신만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들을 발견하는 것으로 대화의 통로를 겨우 뚫는다. ‘단성사 옆 골목 쓰레기통 속 초콜릿 포장지’ ‘평화시장 앞에 꺼진 열 번째 가로등’ 같은 하찮은 사실들이 고립감에 시달리는 이들에겐 얼마나 소중한 위안의 암호코드였던가.

그런데 경제 규모가 수백 배 불어나 풍요를 얘기하는 지금, 사회의 공론들은 얼마나 믿음직하며, 불확실성은 어느 정도 걷혔는가. 세계 최고의 인터넷망으로 연결된 2만 달러 시대의 화려한 밤에 얼마나 많은 김씨와 안씨가 초라한 자화상에 은신한 채 위태로운 고립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게 발성(發聲)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는 과연 갖고 있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선진국이란 너와 내가 믿고 공유하는 사실들의 공간이 넓어지는 상태다. 중대한 정책들이 갈피를 못 잡고 언론매체와 공사기관들도 눈치를 보느라 흔들렸던 한 해, 그래서 불신사회에 발 담그지 못한 자들끼리 서로 달래는 저 안쓰러운 장면으로의 후퇴가 일어났던 2009년, 우리는 무얼 믿고 살아왔던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우리는 무얼 믿고 사는가? 환란과 구조조정의 격랑이 몰아친 지난 10년 동안 한국 사람들은 사회 전반에 대한 신뢰를 슬며시 거둬들였고, 믿고 의지할 만한 기관들은 명성을 잃었다. 신뢰도를 측정한 그래프가 그런 사정을 말해준다.

1997년 위기의 한국 사회를 지탱하던 주역들의 신뢰도는 거의 반 토막이 났고(노동조합·시민단체·대학), 평판이 조금 나아진 정부와 대기업도 신뢰의 영역에 진입하기엔 아직 멀다.

사회적 자율조직의 추락은 가족과 연고망으로의 후퇴를 재촉하고, 저 속절없는 『1964년 겨울』 대화로의 역행을 유발한다. 언론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지 10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쳤다. 사회적 신뢰의 끝없는 하락, 헛도는 공론장, 이해가 엇갈리는 쟁점들의 누적, 그리하여 나만의 사적 공간으로 도피하는 시민들에게 선진국행을 채근하는 정부와 대기업, 그것이 2009년의 모습이었다면 과장일까.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