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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43> 타고르와 쉬즈모의 연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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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5월 8일 징산(景山)에 살던 푸이(溥儀)의 영어교사 존스턴(맨 뒤)의 집을 방문한 타고르(앉은 사람 왼쪽). 쉬즈모(맨 왼쪽)와 린후이인(앞줄 왼쪽 둘째)의 모습이 보인다. 타고르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국무총리 옌후이칭(顔惠慶). 옌의 바로 뒤에 서있는 소년은 푸이의 매제이며 황후 완룽(婉容)의 동생 룬치(潤麒). 김명호 제공

1920년 북양정부 재정부장을 사직한 량치차오(梁啓超)와 전 외교부장 린창민(林長民) 등이 강학사(講學社)라는 학술 단체를 조직했다. 듀이·러셀·타고르·드리슈 등을 초청해 순회강연을 열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4대 명철(四大明哲)’이라고 불렀다. 특히 타고르는 191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후부터 중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해 불과 몇 년 만에 300여 종의 판본이 대도시의 서점에 깔려 있었다. 명성이 나머지 세 명을 합친 것보다 높았다. 듀이·러셀·드리슈의 초청강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강학회는 타고르와 접촉을 시도했다. 타고르는 선뜻 응하지 않았지만 딱 부러지게 거절도 하지 않았다.

타고르의 의사, 가족, 친지들은 건강을 이유로 중국행을 말렸고 프랑스의 로만 롤랑은 절대 가지 말라는 편지까지 보냈지만 타고르가 쉽게 결정하지 못한 원인은 주변의 만류나 건강 때문이 아니었다. 중국은 자신들의 시와 사상과 교육방법이 확실하게 있는 나라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은 소리를 들을 것 같지가 않았다. 까딱하면 무슨 망신을 당할지 몰랐다. 결국 “종교인들처럼 전할 복음이 없고, 철학자의 이론도 갖추지 못했다”며 사양하는 서신을 보냈다. 량치차오는 영국 유학에서 막 돌아온 시인 쉬즈모(徐志摩)를 찾아가 모든 것을 위임했다.

타고르를 초청하기 위해 쉬즈모가 보낸 편지가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청년들은 이제 막 옛 전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선하고 나약한 꽃봉오리와 같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안기고 새벽의 이슬이 입맞춤해 주기를 고대한다. 당신이야 말로 바람과 이슬이다.” 쉬즈모의 과장된 언사는 ‘자연과 생명의 시인’을 움직이고도 남았다. 겨울이 지나고 봄바람이 불면 중국을 찾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1924년 4월 12일 63세의 타고르가 상하이에 첫발을 디뎠다. 중국과 인도의 문화교류가 단절된 지 1000년 만이었다. 북방의 학계를 대표해 상하이까지 내려온 쉬즈모의 영접을 받은 타고르는 항저우(杭州)·난징(南京)·지난(濟南)·톈진(天津) 등 대도시에서 강연을 하며 관광을 즐겼다. 항저우에서 “우리 인도는 패전국이다. 굴욕의 민족이다. 실리가 지배하는 세상, 어떻게 하는 것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모른다.

상처를 입히는 방법도 익힐 기회가 없었다”로 시작되는 강연을 했다. 잠시였지만 “중국에 전혀 도움이 안 될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쉬즈모는 가는 곳마다 통역을 도맡아 했다.

4월 23일 이들을 태운 열차가 베이징에 도착했다. 역 광장에서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고 문화계의 명사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그날 밤 대형 환영회가 천단(天壇)공원에서 열렸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타고르를 대하는 태도는 극과 극이었다.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지식인들은 환영했지만 루쉰(魯迅)·궈모뤄(郭沫若)·린위탕(林語堂) 등은 냉담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적대시했다. 타고르의 강연은 주로 박애와 평화에 관한 것들이었다. 동방문명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서구문명을 여지없이 깎아 내렸다. 정(靜)으로 동(動)을 제압해야 한다며 폭력으로 폭력을 구축(驅逐)하는 것에 반대했다. 당시 중국은 전통사상 비판이 기승을 부리고 혁명의 열기가 팽배해 있을 때였다. 강연장마다 전단이 뿌려졌다. “우리는 왜 타고르에게 반대하나.” “망해 먹은 나라의 시인이 우리를 가르치려 하다니…” “빨리 가줬으면 좋겠다.”

루쉰은 몇 차례의 조롱으로 끝냈지만 천두슈(陳獨秀)는 “과학과 물질문명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 동방민족의 해방운동을 잘못된 곳으로 인도하는 사람”이라며 맹공을 퍼부어댔다. 린위탕은 “타고르는 도대체 뭐 하는 물건이냐”라는 글을 발표했다. 타고르는 여섯 번으로 예정된 베이징 강연을 다 마치지 못하고 귀국했다.

타고르의 방문은 본인도 모르게 중국의 문화계에 엉뚱한 후유증을 남겼다. 이를 계기로 링수화(凌叔華)와 린후이인(林徽因), 후스로부터 “하나의 풍경”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루샤오만(陸小曼), 중국 최초의 여성 금융인 장유이(張幼儀) 등 당대의 재녀들과 요절한 서정시인 쉬즈모의 복잡한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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