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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값·먹튀는 안 돼’ 론스타 콤플렉스가 발목 잡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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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지난주 대우건설 인수에 돈을 댔던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풋백옵션 행사를 한두 달 연기해 달라’는 문서를 보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대우건설 매각이 지지부진해 애초 약속대로 돈을 되돌려주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풋백옵션은 2006년 대우건설 인수에 3조5000억원을 지원해준 은행 등 18개 금융회사가 약정 주가(약 3만2500원)에 대우건설 주식을 금호 측에 되팔 수 있는 권리다. 애초 오는 15일부터 한 달간 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주가(4일 1만2150원)가 워낙 낮아 투자자들이 곧바로 옵션을 행사할 경우 금호 측은 당장 유동성에 위협을 받게 된다. 사정이 이러니 옵션 행사를 내년 2월이나 3월 중순까지로 늦춰달라는 게 금호 측의 요청이다.

지난달 하순까지만 해도 매각작업은 순탄하게 굴러가는 듯했다. 18일 본입찰에 3곳이 참여해 23일 중동계 자베즈파트너스와 미국계 티알아메리카 등 두 곳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자베즈와 티알은 각각 세계 최대 국부펀드인 아부다비투자청(ADIC)과 지난해 미국 뉴욕지역 실적 1위인 티시맨컨스트럭션이 컨소시엄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외국계인 데다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논란이 일면서 매각 작업이 꼬이기 시작했다. 세계 수준인 대우건설의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고, 주가가 다시 오르면 단기간에 막대한 차익을 챙겨 철수하리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연내 매각’이라는 당초 목표엔 차질이 생겼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외국계라면 우선 의심하고 보는 분위기가 파다한데 본계약 협상이 제대로 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 ‘론스타 콤플렉스’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해외자본에 기업을 내주면 국부·기술 유출은 물론 훗날 헐값 매각 의혹에 시달려 담당자가 큰 곤욕을 치를 것이란 우려가 그것이다. 론스타 콤플렉스는 한창 속도를 내야 할 구조조정 대상 기업의 매각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시중은행들이 매각을 추진해온 하이닉스반도체는 지난달 12일 유력 후보인 효성이 인수 포기를 선언하면서 내년 하반기에나 재매각이 추진될 전망이다. 대주주였던 중국 상하이차가 철수한 쌍용자동차도 새 주인을 찾는 작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 해외자본을 제외한 채 새 주인을 찾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은 탓이다.

과천 관가엔 ‘변양호 학습효과’
론스타 콤플렉스는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이 한국 기업과 건물을 많이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미국계 사모펀드인 뉴브리지캐피털은 1999년 제일은행 지분을 인수한 뒤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되팔아 5년 만에 1조원이 넘는 차익을 남겼다. 역시 미국계인 칼라일펀드는 2000년 한미은행 매각 차익으로 7000억원을 벌어들였다. 외환위기에 놀라 너무 헐값에 파는 바람에 이들이 ‘땅 짚고 헤엄치기식’ 장사를 하도록 도와줬다는 ‘후회’가 정부나 금융계에 일기 시작했다. OB맥주·만도 등 제조업체를 인수한 해외펀드들도 인수 뒤 1~2년 내에 유상감자 등으로 투자금액 대부분을 회수해 ‘먹튀’ 논란을 불렀다. 외국 펀드를 보는 시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경제를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에서 ‘약탈자’가 됐다.

2003년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이런 인식을 일반화했다. 외환은행에 2조원을 투자했던 이 펀드는 2년여 뒤인 2006년 국민은행에 지분 전체를 6조5000억원가량에 팔기로 양해각서(MOU)를 맺었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다. 4조5000억원에 달하는 차익이 너무 많았다는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애초부터 헐값에 팔았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적극적으로 ‘헐값 매각, 먹튀 논란’을 제기했다. 급기야 검찰이 인수 과정에 대한 전면 수사에 나서며 국민은행과의 MOU는 없던 일이 됐다.

속죄양을 찾느라 나라가 시끄러웠다. 결국 외환은행 매각을 담당했던 변양호 당시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은 구속됐다. 이후 과천 관가엔 ‘덮고 미루고 떠넘기기’란 말이 유행했다. 나라 경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해도 나서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관가에 파다해졌다. 이를 ‘변양호 신드롬’이라 불렀다. 변 전 국장의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변양호 학습효과’는 지금껏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최근 산업은행이 대우건설에 인수 금융을 제공하겠다고 하는데도 금융 당국이 “채권단이 결정할 일”이라며 뒷짐을 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산업은행이 외환은행 인수 의사를 밝히자 입 단속에 나선 것도 마찬가지다. 권혁세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달 27일 “산업은행이 외환은행과의 M&A를 말할 때가 아니다”며 “국책은행으로서의 역할이 있고 외환은행을 M&A 할 여력도 없다”고 말했다. 국책은행을 통해 ‘정부가 먹튀를 도와준다’는 비판이 커지자 수습에 나선 것이다.

‘은인에서 약탈자로’ 시각 바뀌어
“애초부터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하이닉스 채권단에 참여 중인 한 시중은행 임원은 얼마 전 무산된 매각 시도를 이렇게 평가했다. 하이닉스 매각은 효성그룹과의 매각협상이 지난달 12일 효성 측의 인수 포기 선언으로 결렬된 뒤 안갯속에 빠졌다. 일러야 내년 하반기에나 매각 작업이 재개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채권단은 그동안 40개가 넘는 기업에 인수 의사를 타진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옛 주인 격인 LG그룹마저 손사래를 쳤다. 4조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인수가격은 물론 막대한 추가 설비투자 부담과 반도체 가격에 지나치게 민감한 수익구조 등이 걸림돌이 됐다. 사정이 이런 데도 채권단은 국내 매각 방침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해외자본에 문호를 개방할 경우 ‘반도체 기술이 유출된다’는 반발을 감당할 수 없어서다.

우리금융지주 민영화도 론스타 콤플렉스에 걸려 있다. 현행 법상 금융지주회사의 지배주주가 될 수 있는 곳은 금융지주사와 사모펀드, 외국 금융회사뿐이다. 이 중 외국 금융회사를 빼면 인수자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 하나지주가 우리지주와의 M&A에 관심이 있다지만 자금여력이 부족한 데다 효성처럼 특혜 시비에 걸릴 우려가 있다. 국내 사모펀드들은 아직 시작 단계다. 그렇다고 하나 남은 토종 은행마저 외국자본에 넘길 수 없다는 정서를 거스르기도 어렵다. 금융권에선 우리은행 민영화가 일러야 2011년에나 시작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 진행될 대형 M&A도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몸값 3조원 이상인 초대형 매물만 해도 대우인터내셔널(3조원), 하이닉스(4조원 이상), 대우조선해양(3조~4조원), 현대건설(4조원 안팎), 외환은행(5조~6조원) 등이 대기 중이다. 쏟아지는 매물에 비해 살 곳은 적다. 삼성과 LG 등 선두 그룹은 독점이나 문어발 확장 논란 등을 의식해 국내에서 대형 M&A를 하기가 쉽지 않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처럼 사업영역이 겹쳐 시너지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효성과 같은 중소그룹은 자금여력이 없다. 국내 사모펀드도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의 규모가 많아야 2000억~3000억원에 불과하다. 대형 M&A가 있을 때마다 포스코 등 몇 개 기업이 주목받는 이유다. 포스코는 대우조선이나 대우인터내셔널은 물론 사업적 관련이 거의 없는 하이닉스의 잠재적인 인수 후보자로까지 거론된다.

외환은 매각 무산, 론스타 이득은 더 커져
론스타 콤플렉스의 밑바닥엔 ‘먹튀를 차단하고 기술 유출을 방지한다’는 감성이 흐르고 있다. 국내 자본과 기술로 키운 기업을 헐값에 외국에 넘겨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성이 되레 국부 유출을 키울 수도 있다. 최근 다시 거론되는 외환은행 매각이 좋은 예다.

금융권에선 요즘 외환은행 매각을 ‘론스타의 꽃놀이패’로 부른다. 몇 년간의 논란 끝에 법적인 책임에서 벗어난 데다 2006년 국민은행에 팔았을 때보다 더 많은 차익을 거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론스타는 2006년 매각이 무산된 후 투자금액의 87%인 1조8000억원을 배당 등으로 외환은행에서 회수해갔다. 매각가격도 2006년 수준(6조5000억원)과 비슷할 전망이다. 경쟁이 붙으면 더 올라갈 수도 있다.

외환은행 주가는 28일 1만4650원으로 마감해 2006년 매각 협상 당시의 주가(1만4000원대)를 회복했다. 주가의 10∼20%로 전망되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감안하면 매각가격이 6조원 안팎이 되리라는 게 금융권의 전망이다. 매각대금과 배당으로 회수한 금액을 합치면 론스타로선 3년여간 발목을 잡힌 대가를 톡톡히 받게 된다는 얘기다. 국내 정치권·검찰·여론이 냉정한 계산 없이 ‘국민정서법’을 들이댔다가 국제적으로 망신만 당하고 신뢰를 잃은 데다, 결국 국부 유출 규모마저 키운 셈이다. 금융계 관계자는 “당시 목소리를 높였던 여야 의원이나 검찰, 언론들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며 “책임을 못 지면 최소한 사과라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이중 기준을 들이댄다는 해외자본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상하이차가 철수하면서 한국에선 ‘기술 먹튀’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상하이차 측이 5900억원의 투자금을 모두 포기했는 데도 그랬다. 2004년 매각 당시 나왔던, ‘주가보다 40% 높은 가격에 팔아 경영권 프리미엄을 충분히 받았다’는 평가는 까맣게 잊혀졌다.

한 M&A 전문가는 “M&A의 목적에서 차익이나 기술을 빼면 뭐가 남느냐”고 지적했다. 외국에 국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런 논란이 한국의 해외 평판을 떨어뜨린다는 우려도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민은행이 인도네시아의 한 은행을 인수해 몇 년 뒤 몇 배의 차익을 얻고 되팔았지만 현지에서 먹튀라는 비난은 없었다”며 “한국의 경제규모와 해외거래 비중을 생각해서라도 론스타 콤플렉스를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고려대 이장혁(경영) 교수는 “론스타 콤플렉스는 외국자본은 기술도, 차익도 기대하지 말고 돈만 투자하라는 말과 다름없다”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고 국가경제와 장기적인 산업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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